[전문]윤증현 재정부 장관 3번째 편지

머니투데이 이학렬 기자 2009.03.30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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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30일 "추경은 승지(勝地)를 굳힐 또 하나의 요소"라고 말했다.

윤 장관은 이날 G-20 정상회의 출국에 앞서 소속직원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다음은 윤 장관의 편지 전문



1929년 분노와 승지(勝地)
기획재정부 직원 여러분. G-20 회담을 위해 내일 아침 출국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대공황 이후 최악이라는 이번 경제위기에 대한 국제적 정책공조를 위한 자리입니다.



얼마전 영국 BBC방송과 인터뷰할 때 기자가 "G-20에서 실효성 있는 정책공조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어떻게 될 것 같냐"고 묻더군요. 저는 대공황 당시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의 절망을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은 대공황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1929년? 실업률 25%? 연간 2만여명의 자살?

제게 대공황은 이런 숫자보다는 소설 한구절로 남아있습니다. 존스타인벡은 소설 『분노의 포도』에서 당시 상황을 “굶주린 사람들의 눈에는 패배의 빛이 떠오르고,
영혼 속에는 분노가 번득인다”고 묘사합니다.


대공황으로 땅과 일터를 잃은 사람들이 거리로 내몰리고, 거대한 행렬이 되어 약속의 땅 캘리포니아로 떠납니다.

이주 노동자로 가득찬 캘리포니아행 66번 도로 위에서 그들은 나머지 가진 것마저 하나하나 잃고말죠. 주인공 톰 조드 가족이 할아버지, 할머니, 아기, 전재산 154달러, 절인 돼지고기를 잃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도착한 캘리포니아 상황은 더 비참합니다. 절망이 전염병처럼 번집니다. 절망은 이들의 영혼을 갉아먹고, 그 자리엔 참담한 분노가 자랍니다.

물론 지금의 경제위기와 대공황은 확연히 다르지만, 이 소설은 경제위기가 개인과 가족을 어떻게 파괴시키고, 어떻게 사회위기로 번지는지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기획재정부 직원 여러분, 내친 김에 소설 이야기 하나 더 꺼내볼까 합니다.



왜란, 호란, 동란 등 유난히 전란(戰亂)이 많았던 탓인지 우리 민족은 전쟁이 비켜가는 안전한 피난처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그런 곳을 승지(勝地)라고 불렀습니다.

그중에서도 아주 뛰어난 열곳을 십승지지(十勝之地)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영화 『동막골』같은 곳일테지요.

잊고있던 이 승지라는 말을 소설 『남한산성』에서 다시 발견했습니다.



성 둘레에 깊은 물길이 있어 적이 쉽게 다가오지 못하고, 성이 가팔라 적이 성벽에 붙기 힘들고, 성 안에 물줄기와 농토가 있어 지구전을 벌일 수 있는 반면, 성을 에워싼 적은 허허벌판에서 식량도 진지도 없이 추위와 싸우고 있다면 이 성은 승지(勝地)라는 것이죠.

반면 출입로가 외길이어서 막히면 갇히고, 갇히면 식량을 구할길이 없어 시드는데 반해, 성밖의 적은 마을에서 약탈과 노획으로 버틸 수 있고, 그래서 에워싸고 지구전을 벌이는 것만으로도 성안을 말라시들게 할 수 있다면 그 성은 사지(死地)입니다.

즉, 승지는 시간이 우리편으로 흐르는 곳이고, 사지는 시간이 적의 편으로 흐르는 곳이라고 지은이는 설명합니다.



주지하다시피 남한산성은 시간이 적의 편으로 흐르는 곳이었고, 인조 임금은 47일만에 주전파 신하들을 묶어서 앞세우고, 성밖 청나라 진지로 갑니다.

끌려온 조선 기생들이 춤을 추는 가운데 청나라 황제는 술 석잔을 내리고, 인조는 한잔당 3번씩 모두 9번의 절을 하면서 항복합니다. 임금에 대한 대우가 이럴진대 백성들의 고초야 이루말할 수가 없었겠죠.

추경, 승지를 굳힐 또 하나의 요소
기획재정부 직원 여러분, 대공황 이후 최악이라는 이 경제위기가 수습돼 새로운 국제질서가 구축되었을때 어떤 나라는 승자가 되어있을 것이고 어떤 나라는 패자가 되어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요?우리는 지금 이 국가간 생존전쟁에서 ‘이기는 싸움’을 하고 있는 걸까요? 시간은 우리편으로 흐르고있는 걸까요? 우리는 지금 승지(勝地)의 조건을 마련한 것일까요?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재정지출 여력, 기업·금융회사의 건전성, 외화유동성,
위기를 극복해본 경험, 국민들의 역동성과 공동체 연대감, 잡쉐어링의 확산 등 여러면에서 우리는 승지의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보다 먼저 위기를 극복할 것입니다. 시간은 우리편으로 흐르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거기에 덧붙여 승지를 굳힐 또 하나의 요소가 이번 추경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1929년이든 2009년이든 궁핍의 시기에 가장 힘든 사람은 경제적 약자들입니다. 서민, 자영업자, 실직자, 미취업자, 여성, 중소기업 등 경제적 약자들이 생존의 벼랑에 몰리곤 합니다.



실직 가장이 가족의 생계를 걱정하며 느낄 암담함, 졸업하자마자 갈 곳이 없어진 미취업자의 패배감과 서글픔, 임계점에 다다른 서민가계의 고단함...

그래서 이번 추경은 경제위기의 시대에 가장 고통을 받고 있는 취약계층에 대해 최소한의 생계유지와 주거안정을 뒷받침하는 것과, 일자리를 지키고 만들어 이들 경제적 약자가 재도약을 준비할 수 있게 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기획재정부 직원 여러분, 우리의 2009년은 과거와 달라야합니다. 1929년은 분노를 전달했지만, 지금 우리는 희망을 전달해야합니다. 어려운 이웃에 대한 지원도 때가 있습니다.



추경이 타임래그없이 가장 빠른 시간안에, 누수없이 온전하게, 필요한 곳에 전달될 수 있길 희망합니다.

사랑하는 기획재정부 직원 여러분, 일상화된 야근과 주말 근무로 고단하시죠?
늘 고맙고 미안한 마음입니다. 다행히도 시간은 우리편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땀과 고뇌가 희망을 만들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기는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2009.3.30 윤증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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