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금융위기와 관련해 케인즈가 남긴 명언 중의 하나는 "장기적 관점은 당장의 문제해결에 지침이 되지 못한다- 장기적으로 보면 우린 다 죽는다"일 것이다. 충분한 시간이 지나가면 시장에 의해 문제가 결국 해결될 것이라는 기존 경제학자들의 도그마에 일격을 가한 것이다.
케인즈의 위 인용구가 실린 책의 끝부분에 또 하나의 명언이 있다. "경제학자와 정치철학자의 아이디어들은 옳건 그르건 통상 이해되는 것보다 더 강력하다. 사실 이들이 세계를 지배한다. 자신은 지성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있다고 믿는 실무가들도 이미 죽은 경제학자의 노예이기 십상이다."
사실 레이건 혁명이 위세를 떨치고 있던 당시부터 경제학자들은 한편으로는 금융시장의 혁명을 도모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시장지상주의의 위험성을 끊임없이 경고해 왔다. 이번 위기의 모든 과정에서 드러나고 있는 정보 부족 현상과 도덕적 해이는 수많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를 배출하는 토양이 됐다. 그러나 경고들은 무시돼왔다. 이들의 학문적 결론이 시장지상주의에 수정을 가할 수밖에 없는 성향, 즉 진보성향을 띄었고 결국 도그마 앞에선 어찌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죽은 경제학자와 정치철학자의 아이디어들이 유령처럼 우리 주위를 배회하고 있다. 조만간 입시를 치를 수험생들이나 실직과 비정규직 일자리로 당장 고통 받고 있는 이들의 문제가 어느 새 탁상 도그마들의 전투장으로 뒤바뀌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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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산적한 현안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랫동안 제도 변화 문제를 풀어보려했던 이들이 축적한 경고들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들의 경고는 적절한 제도가 만족해야 할 3가지 조건으로 요약된다. 환경 적응성, 경로 의존성, 제도 정합성이 그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10년 넘게 진행돼온 제도 변화는 대체로 이 중 한 가지 조건, 즉 환경 적응성만 만족한다. 한때는 글로벌스탠다드를 추종하기 위해 또 한 때는 양극화에 대응하기 위해 또 지금은 글로벌 경쟁에 승리하기 위해 제도 변화를 밀어붙이고 있다.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제도 변화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역설적이지만 이들 제도 변화는 모두 선의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동시에 이들은 우리의 과거나 주변 여건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경로의존성이나 제도 정합성을 만족 못한다.
선의에서 출발했던 제도변화가 각종 문제를 일으키며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어둠의 시대에 시장을 지켰던 하이에크가 시장만큼 사회적 전통의 중요성도 누누이 강조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사회는 설익은 아이디어의 실험실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