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고임금 때문에 고용 망설여"

머니투데이 반준환 기자 2009.02.16 08:22
글자크기

'은행 대졸초임 4316만원'(하)

편집자주  국내 6개 시중은행의 대졸 초임이 평균 4316만원으로 대기업 과장수준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파장이 확산되고 있다. 은행들은 유능한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또 업무가 과중해 높은 보수가 불가피하다고 해명하지만 정작 은행 내부에서도 왜곡된 임금체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은행들은 고임금에 발목이 잡혀 상반기 신규 채용을 포기했다. 금융공기업이 임금을 줄여 일자리를 늘리는 것과 비교된다. 경쟁력을 높이는 데 고임금이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며 고임금이 고착되는 호봉제 등은 개선돼야 한다는 게 은행권 안팎의 시각이다.

- 호봉제 폐지 등 점진적 하향조정 목소리
- 임금피크제 대안부각, 직무급제 확대주장도


"은행장이 된 후 성과보상제를 도입하려 했더니 노조가 찬성했습니다. 그런데 지점이나 부서단위에서 직원 개인까지 제도를 확대하려 하자 '평가기준이 뭐냐'며 반발하더군요. 객관적인 기준을 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몇십 억원을 들여 맥킨지에 컨설팅을 의뢰했습니다. 그리고는 평가기준을 제시하자 1주일 뒤 노조위원장이 찾아왔습니다. 머리가 아파서 다 보지 못했는데, 일단 반대한다는 겁니다."



"은행, 고임금 때문에 고용 망설여"


김정태 전 국민은행장이 퇴임 후 강연 등에서 공개한 경험담이다. 그는 동원증권 부사장 시절 업계 최초로 성과급제를 도입했고, 국민은행장을 맡아서는 급여 대신 스톡옵션만 받을 정도로 성과급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은행에 과감한 성과급체계를 도입, 월스트리트처럼 높은 급여를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능력 있는 인재들을 은행으로 영입하고 기존 직원들의 의욕도 고취하겠다는 취지였다. 호봉제 대신 성과급제를 도입하려는 그의 시도는 노조의 반대로 무산됐다. 호봉제가 폐지되면 임금이 깎이는 직원이 생길 수 있다는 게 노조의 이유였다. 김 행장은 결국 반쪽짜리 성과급제를 도입하는 대신 젊은 직원들을 조기승진시키는 절충안을 찾아야 했다.



"은행의 가장 큰 폐해 중 하나가 호봉제"라는 김 행장의 산경험은 은행권의 임금체계를 바로잡는 게 얼마나 어려운 지 보여준다.

한국능률협회에 따르면 국내기업 중 56%가 호봉제를 채택하고 있고, 연봉제는 30%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이를 절충하고 있다. 은행들은 연봉제와 호봉제를 혼용하고 있으나 실제 급여는 90% 이상이 호봉제로 정해진다.

은행들은 보통 S~D등급의 인사고과에 따라 상여금을 차등화하나 기본급에 변화가 없고 고과에 따른 연간급여 차이도 적다고 한다. 성과가 없고, 승진에서 누락돼도 임금은 계속 올라간다는 얘기다.


은행원의 전문성과 업무 강도를 생각하면 이같은 문제는 지엽적이라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은행의 공적 기능이나 외환위기 당시 정부의 지원을 감안하면 결코 가볍지 않은 문제라는 게 은행 외부의 시각이다. 은행들은 수십 조원의 혈세 덕분에 외환위기를 넘길 수 있었는데 이후 순익이 급증했다는 이유로 높은 연봉을 챙기는 게 과연 적정하냐는 지적이다.

시중은행의 한 임원은 "직원 1명을 채용하는 경우 당장의 인건비뿐 아니라 여러 가지 부대비용이 발생한다"며 "보험, 복지비용, 퇴직금 등이 있으나 호봉 승급에 따른 임금부담이 만만치 않다"고 말했다. 그는 "고용을 망설이는 건 경기침체 영향이 가장 크지만 고임금 또한 배경 중 하나"라며 "현 수준의 급여는 지나치게 높은 게 사실"이라고 전했다.

은행들이 '일자리 나누기'(잡셰어링)를 외치면서도 정작 신규 채용은 하지 않는데는 호봉제의 폐해가 자리잡고 있어서다. 호봉제는 단순한 근속연수에 따른 임금격차 확대, 은행의 고정비용 부담증가, 과도한 급여 및 퇴직금 등의 문제를 야기한다. 이를 바로잡으려면 호봉제를 폐지하는 한편 은행원의 급여를 점진적으로 낮추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임금피크제의 확대 시행이 현실적인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은행원의 임금상한을 단순히 정하는 게 아니라 고용형태에 따라 운영방식을 달리하면 효율을 높일 수 있다. 예컨대 고용창출을 위해 신입행원의 급여한도를 낮게 책정하되 직급 승진 및 근무연한에 따라 한도를 점차 올려줄 수 있다. 또 은행 경영실적에 따른 성과급 배분을 통해 탄력적 운영도 가능하다.

일자리 유지라는 측면에서는 △정년보장형 △정년연장형 △고용연장형 등 다양한 방식을 검토할 수 있다. 정년보장 및 연장의 경우 일정 연령 및 직급까지는 임금을 올리되 그 이상이면 매년 임금을 낮추는 형태다. 연령별 호봉 상한제, 혹은 자동승급제도 폐지와 연계할 수 있다.

직무급제를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직무에 따라 임금을 차별하고, 기본급에도 이를 반영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밖에 은행들이 신입사원 초임을 낮추고, 직급에 따라 계단식으로 상승하는 임금체계를 과감히 도입해야 한다는 제안도 나온다.

황수경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금융권 특성상 임금이 높은 이유가 있으나, 최근에는 조금 과하다 싶은 느낌이 있다"며 "특히 기여도가 낮은 신입행원들의 임금이 높은 기형적인 임금구조는 바로잡아야 한다"고 전했다. 그는 "은행권 노조 내부적으로도 문제가 있다고 인식하는 만큼 노사가 머리를 맞대고 대안을 찾을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이 기사의 관련기사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