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시평]에너지 산업과 국가전략

김화진 서울대 법대 교수 2009.02.12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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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시평]에너지 산업과 국가전략


20년전인 1989년에 석유협회가 발간한 자료에 '현재 5개 정유사 중 4개사가 100% 민족자본에 의한 석유회사로 변모했다'고 다소 자랑스럽게 적혀있다. 그런데 지금은 사정이 정 반대다. 유일한 국내자본인 SK에너지도 몇 년전에 해외자본인 소버린의 공격을 받은 일이 있다.

에너지산업만큼 거시경제·외교정책과 밀접하게 연관된 산업이 없을 것이다. 에너지 문제는 국제정치의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국제사회에서 무력분쟁은 상당부분 에너지 문제에서 기인한다. 글로벌 경제와 정치는 향후 군사력 불균형이나 영토문제가 아니라 에너지와 담수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될 것이다.



서방 석유의 40%가 통과하는 호르무즈해협이 미국과 이란의 관계, 중동평화를 좌우한다. 세계 최대의 교역상품인 석유를 달러가 아닌 다른 통화로 결제하려는 나라는 미국의 경제·군사제재를 받는다. 러시아와 서방의 이해관계는 카스피해 연안과 러시아의 흑해함대가 있는 우크라이나 파이프라인을 통해 충돌한다.

에너지 전쟁은 미시적으로 에너지관련 기업들을 통해 수행된다. 민간기업이든 국영기업이든 에너지를 생산하고 유통시키는 터미널은 기업들이다. 국제정치의 커다란 조류와 에너지 관련 글로벌 기업들의 경영전략, 인수합병(M&A), 지배구조, 자금조달은 서로 연관돼 있다.



그러나 메이저들의 영향력은 점차 축소되고 있으며 이제 국영기업들이 주역이다. 메이저들은 1970년대부터 중동과 러시아, 동유럽으로부터 '축출' 당했고 석유수출국기구 OPEC이 생산량을 조절하고 있다. 메이저들은 스스로 시설투자를 포함한 성장 전략을 소홀히 해왔다.

메이저들은 규모가 지나치게 크기 때문에 소유가 분산될 수밖에 없다. 2008년말 기준 시가총액 1위인 엑슨모빌은 삼성전자의 약 7배 되는 회사다. '주주가치'라는 모토하에 경영진은 투자보다 주주에 대한 이익 환원에 치중하고 주가 관리를 위해 배당과 자기주식 매입에 치중한다. 성장과 기술 개발을 위한 투자 여력은 축소된다.

에너지 기업의 소유지배구조와 국가전략의 관련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는 러시아다. 푸틴 대통령은 에너지산업을 직접 자신의 통치력하에 두려고 한다. 2004년에 국영 천연가스회사인 가즈프롬에 국영석유회사 로스네프트를 합병시키고,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는 신흥재벌 호도르프스키 유코스 회장을 제거한 후 유코스의 자회사 유간스네프테가즈를 가즈프롬에 인수시켜 사우디아람코와 같은 거대 국영 에너지회사를 탄생시켰다.


러시아의 가스공급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유럽을 상대로 푸틴은 가즈프롬을 지정학적 전략도구로 활용한다. 경영진에 최측근들을 배치시켰음은 물론이다. 메드베데프 대통령도 가즈프롬 출신이다. 러시아 의회는 가즈프롬이 자체 병력을 보유하는 것도 승인했다.

국제여론이 악화되자 러시아는 중국과의 제휴로 그 무마를 시도했다. 2004년 10월 러-중 정상회담 후 중국의 CNPC에 유간스네프테가즈 지분의 20%가 양도돼 국제사회의 비난은 약화되고 미국은 견제 당했다.



우리나라의 국가발전전략 수립에도 에너지기업의 소유지배구조 측면의 고려가 충분히 포함돼야 할 것이다. 에너지 산업은 세계적으로 지난 30년전에 중동과 중남미에서 붐을 이뤘던 자원회사 국유화 과정과 유사한 정치적 환경하에 있거나 최소한 소재지국 정부의 강력한 영향력하에 놓이고 있다.

에너지생산국이 아닌 우리나라가 에너지산업을 국가전략으로 활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고, 전략이 있다면 방어적일 것이다. 그런데 최근 석유공사가 중국을 물리치고 페루의 석유회사를 콜롬비아 국영석유회사와 공동으로 인수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이는 우리나라가 현재 국제조류에서 취할 수 있는 중요한 공세적인 움직임으로 높이 평가돼야 할 것이다.

사우디의 7%밖에 안되는 에너지국인 중국이 아프리카와 남미에서 자원외교에 크게 성공하고 현지 에너지기업에 대대적으로 투자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이 정치적 부담이 없는 외국세력이고 중국 에너지회사들이 주주가치에 구애되지 않고 국가전략적 결정을 할 수 있는 국영기업들이기 때문임을 참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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