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에 '척'하면 '착', 때론 한마디 속에 복합적 내용과 미묘한 뉘앙스까지 담겨 신속한 의미전달이 된다. 긴 단어도 한 글자 '은어'로 표현할 수 있다. 국어사랑의 측면에서 보자면 '정화'의 대상이지만 '은어'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다.
기업도 해당 업종별로 다양한 은어가 있다. 심지어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한 마디도 못 알아 듣는 문장이 될 수도 있다.
#모 증권사 강남 한 지점의 일화. 공부면 공부, 연애면 연애 어느 것 하나 빠질게 없이 '잘 나가던' 윤종석씨(이하 가명)는 2008년 남들이 부러워하는 굴지의 증권사에 당당히 입사했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일선 영업현장 분위기가 낯설었지만 윤씨는 늘 여유를 잃지 않으려 애썼다.
"종석씨, 요즘은 롱이 맞아, 숏이 맞아?"
순간 당황한 윤씨. 머리 속을 재빨리 굴려보지만 도대체 질문 내용을 알 수 없다. '롱? 숏?' 속으로 계속 되 뇌이며 머뭇거리던 윤씨, 드디어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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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회의가 팍팍하니까 이런 농담도 하시는구나, 짓궂으시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자신 있게 입을 열었다.
"요새는 여자들 개성에 따라가는게 대세입니다"
그는 폭소를 기대했건만 분위기는 썰렁하다 못해 섬뜩하기까지 하다. 싸늘한 눈길도 쏟아졌다. 윤씨의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왜들 그러시지? 내가 그래도 '그 분야'에는 자신 있는데…'
사정은 이렇다. 롱 포지션(선물 매수 포지션), 숏 포지션(선물 매도 포지션)을 가리켜 '롱', '숏'이라고 말하는데 윤씨는 이를 그만 '여성들의 치마길이'로 해석해버린 것이다.
순식간에 소문은 회사 전체로 퍼졌고 지점장과 상사들로부터 "저런 놈이 어떻게 증권사를 들어왔나", "평소 무슨 생각을 하며 살까"하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순간의 재치(?)가 긴 후회를 남겼다.
#어렵다는 은행 취업에 성공한 장봉준씨. 일선 지점 창구에서 업무의 기본을 익히기 시작했다. 고객의 수표를 현금으로 바꿔주고 일반 예금업무도 처리하고 바쁘다.
옆자리 상사가 난데없이 묻는다. "너… 떨고 있니?"
'엥? 무슨 드라마대사도 아니고 이게 무슨 소리야.' 영문을 몰랐지만 일단 얼떨결에 "네"라고 대답했다.
전쟁 같은 영업시간이 끝나고 정산작업을 하는데 이상하다. 딱 맞아떨어져야 할 입출금 내역이 빈다. 아무리 계산해도 돈이 부족하다.
이때 상사가 불호령을 내렸다. "너 제대로 안 떨었네!"
장씨의 머리는 더 복잡해졌다. '내가 긴장을 안했다는 소리인가? 아까부터 왜 자꾸 저러지?'
사연인즉 자기은행 수표를 받아 현금으로 내주면 수표에 '사용불가' 도장을 찍는 등 처리작업을 하는데 이를 '떤다'고 표현한다. '떨지' 않았으니 이미 나간 현금이 처리가 안돼 돈이 비었던 것. 장씨는 덕분에 제대로 떨었다.
#자동차 관련 대기업에 입사한 박진주씨는 아직도 알파벳 기호를 보면 가슴이 콩닥거린다. 박씨는 업종특성상 신차 프로젝트코드를 많이 접하지만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가령 카니발 후속 모델은 'VQ', 투스카니 후속 모델은 'BK'로 통칭하는 식이다.
하루는 외근 중이던 소속부서 직속 임원이 회사로 전화를 걸어와 책상 위 수첩에 적힌 내용을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박씨는 이것저것 적힌 메모를 열심히 불러드렸다. 하지만 'AM 11,000대'에서 막혔다. '아하, 표기가 좀 잘못됐구나'
이내 알아차린 박씨는 "오전 11시(AM 11:00)"라고 말했다. 임원이 "무슨 소리야?"라고 되물었지만 박씨는 의심 없이 "오전 11시"를 되풀이했다.
'AM'은 기아차 '쏘울'의 프로젝트 명이었다. '쏘울 1만1000대'를 '오전 11시'로 끝까지 우긴 박씨는 이제는 누구보다 업계용어에 능숙하게 됐다.
#정유업체에 들어간 신입사원 하성창씨는 귀를 의심했다. 공장에 나가 들은 말들이 너무 해괴했기 때문이다.
"처리량을 까다보니 밑으로 설사해서 그렇습니다"
암호 같은 말을 한 마디도 알아 들을 수 없었다. '까다'는 양을 줄인다는 뜻이고 '설사'는 제품이 제대로 처리되지 못해 불순물이 원하지 않는 곳으로 나온다는 말이다. 즉 "정제하는 양을 줄이다 보니 불순물이 나오고 있다"는 뜻이지만 신입은 '난독증'에 빠질 수밖에 없다.
대기업 해외영업 부문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석형씨도 마찬가지다. 회의 때마다 선배들이 주고받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 답답했다.
"이번 출장자료는 김과장이 마도구찌해서(종합해서) 보고해. 결재 끝나면 돌돌말이해서(제본해서) 회람하고" "오더 한 로뜨(생산단위. 품목마다 수치가 다르다)가 안 들어가서" 등등…
#택배업체에 취직한 오진우씨는 반대의 경우를 당했다. 입사 후 1~2달이 지나자 슬슬 업계 은어에 익숙해졌고 자신도 모르는 새 능숙히 관련 용어를 쓰는 모습에 내심 흐뭇하기도 했다. 이제 어엿한 업계의 한 일꾼이 됐다는 생각이다.
"과장님 깡통 30개 들어온답니다"
오씨는 직속 상사에게 의연히 보고를 했다. '깡통'이란 물류업계에서 빈 컨테이너를 뜻하는 말.
"누가 그런 말 쓰라고 했지?" 뜻밖에 돌아온 답은 냉랭했다. 신입이 공식적 용어를 쓰지 않고 업계의 오랜 은어를 함부로 쓰자 건방져 보였던 것이다. 오씨는 그날 '정신교육'을 톡톡히 받았다.
이런 은어들을 빨리 익히는 방법에 정도는 없다. 업계 선배들은 "그저 신입의 자세로 열심히 노력하는 길밖에 없다"고 말한다.
다만 그 중에서도 끊임없이 물어보는 자세를 공통으로 꼽는다. 잘 모르면서 아는 척해서 순간만을 모면하려고 하기보다 귀찮을 정도로 일일이 물어보라는 지적이다.
메모도 필수다. 보험업계 4년차인 문준영씨(31)는 "신입사원 시절 업계용어를 익히느라 끊임없이 메모하는 습관을 가졌다"며 "묻고 메모해두는 방법이 지름길"이라고 조언했다.
박태정 현대모비스 인사기획팀장은 "신입사원들이 빠른 업무 적응을 위해 흔히 사용되는 은어나 전문용어를 가능한 빨리 배우는 노력이 필요하다"면서 "회사도 은어들을 가능한 범위 내에서 표준화시키는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