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인기리에 종영된 TV드라마 '베토벤바이러스' 때문일까. '2009 머니투데이 신년음악회'를 찾은 관객들의 시선은 온통 지휘자에 쏠려 있었다. 음악은 그저 악기 연주로 만들어진다고 믿었던 한국의 관객들은 이제 오케스트라 전체를 조율하고 이끌어가는 마에스트로의 가치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날의 마에스트로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이었다.
와인 빛 드레스를 걸친 채 마에스트로와 손을 맞잡고 등장한 첼리스트 정명화는 거친 춤곡으로 다소 들떠있는 관객들을 향해 와인 한잔을 건네듯 섬세하고 차분하게, 그리고 매혹적인 자태로 활을 당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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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중 목관과 두대의 호른, 그리고 현악기군이라는 고전적인 관현악 편성으로 자칫 지루할 뻔 했던 '로코코 변주곡'은 차이코프스키 특유의 감성이 가미돼 풍부하면서 때론 격정적이었다.
모차르트 풍의 아기자기한 주제가 제시되고 변주가 거듭될 수록 정명화의 보잉(bowing)은 거칠어졌다. 때론 신경질적이기 까지 했다. 피날레 전에 이르러선 오케스트라는 화난 첼로를 달래려는 듯 말하기를 멈췄다. 오직 첼로만이 자신의 전 음역을 오르내리며 때론 흥분한 남성의 목소리로, 때론 사근사근한 여인의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정명화 정명훈 두 남매가 선사한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한 메인요리에 관객들은 큰 박수로 화답했다.
2악장에 이르러 그 유명한 잉글리시 호른에 의한 목가적 선율이 흘러나올 땐 객석에선 말없는 찬사가 터져나왔다. 잉글리시 호른의 음색에는 우수와 그리움이 묻어있었지만 초라하진 않았다. 그래서 매혹적이고 아름다웠다.
3악장까지 연주되면서 복선처럼 간간히 제시되던 주제의 조각들은 4악장에서 한데 어우려져 강력한 에너지를 발산했다. 보헤미안적 선율로 자칫 가벼운 감성적 연주로 흐를 수 있었지만 오케스트라 특유의 두터운 질감과 세련된 화음, 짜음새있는 구성력으로 이를 극복했다. 웅대한 피날레를 마친 마에스트로의 얼굴은 상기돼 있었다.
'신세계'를 끝으로 퇴장한 정명훈을 관객들은 놔주지 않았다. 뜨거운 박수와 열띤 환호로 수차례의 커튼콜 끝에 앙코르 곡을 받아냈다. 서울시향이 앙코르로 선사한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번 4악장의 피날레로 이날 음악회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현실의 고된 삶으로 마음이 무거웠을 관객들은 비록 2시간반의 짧은 시간이지만 풍성한 음악의 향연에 흠뻑 젖어 다시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고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