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적한 실탄으로 세계 사냥 '되찾는 10년'

머니투데이 김익태 기자 2009.01.06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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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출발! 2009]금융시스템, 새로운 도전<2>

금융위기로 전세계가 홍역을 앓고 있다. 진앙지인 미국은 실질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로 돌아섰고 고용시장에선 최악의 실업사태를 우려하고 있다. 대서양 건너편 유럽은 기업을 살리기 위해 재정적자를 감수해야 할 정도로 사정이 녹록지 않다.

한국 역시 주식, 부동산 등 자산가치가 급락한 탓에 어려움이 크다. 정부는 비상경제상황실을 꾸리며 실질적인 '워룸'(war room) 체제를 구축했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과도하게 늘린 차입금과 저수익사업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디레버리지가 필수다. 한국으로서는 그리 간단한 작업이 아니다. 한국경제가 고성장하는 과정에서 레버리지 효과를 본 탓이다. 또한 기업들은 외환위기를 거치며 레버리지를 이미 축소해 최근 디레버리지는 가계나 중소기업 등에 집중될 수 있다는 점도 부담요인이다.



아시아 외환위기 충격을 거의 받지 않은 대만, 거품 붕괴 이후 고통스럽게 잃어버린 10년을 경험한 일본의 사례는 우리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특히 일본은 '10년 불황'을 디레버리지로 이겨낸 덕분에 최근 금융위기를 전대미문의 기회로 활용할 것이라는 예상까지 나온다. 디레버리징은 한국에도 위험이 아니라 기회가 될 수 있다.

◇'잃어버린 10년'= 1980년대 말 일본에서는 최근 미국에서 벌어진 주택시장의 거품이 부풀어 올랐다. 땅값은 56∼86년 50배 이상 치솟았고 일본인 뇌리에는 '부동산 불패'라는 강한 믿음이 형성됐다. 은행들은 채무자의 현금수입을 고려하지 않고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해줬고 풍부한 유동성에 힘입어 자산가치가 과도히 상승했다.



주가의 고공행진도 부동산 거품으로 합리화됐다. 85∼90년에 일본 은행들의 대출규모가 96조엔까지 늘었는데 이중 절반 이상이 부동산 투기에 빠진 소기업들에 흘러들어갔다. 비은행 금융회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들의 부동산 담보대출 취급규모는 85년 22조엔에서 89년 말 80조엔으로 4배가량 폭증했다. 부동산 담보가치의 2배까지 대출이 이뤄진 경우도 있었다. 90년 일본 전체의 부동산가치는 2000조엔이 넘어 미국 전체 땅값의 4배에 달했다.

거품은 꺼지기 마련이다. 90년 들어 주식과 부동산시장에 잔뜩 끼어 있던 거품이 걷히기 시작했다. 92년 말 도쿄 중심지의 부동산가격은 최고점에서 60% 하락했고 이후 일본의 부동산가격은 90년대 내내 내리막길을 걸었다. 과도한 대출을 한 은행들이 막대한 부실을 떠안게 됐다. 급기야 95년 도쿄신용조합을 필두로 일부 금융회사에서 2차대전 이후 처음으로 예금인출사태가 벌어졌고 이후 은행들의 파산이 이어졌다. 거품이 꺼지기 시작한 지 9년인 98년 은행들은 부실규모를 파악할 수 없는 처지까지 내몰렸고 기업들은 사상 최대 손실을 기록했다.

결국 그해 일본정부는 당시 국내총생산(GDP)의 12%에 달하는 600조엔의 구제금융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그 여파로 수많은 기업은 운영자금을 조달하지 못해 도산에 직면했다. 일본경제는 95년과 96년을 빼곤 1% 수준을 밑도는 실질경제성장률을 기록할 정도로 장기침체를 겪었다.


◇'되찾은 10년'?= 장기침체에서 벗어난 일본에 최근 전세계 금융위기는 기회로 부상하고 있다. '잃어버린 10년'을 겪은 일본 기업들은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하는 등 보수적인 경영을 견지했다. 반면 최근에는 불황에도 불구하고 공격적인 투자에 나서는 등 확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불황기에는 부실기업은 물론 일시적 유동성 위기에 빠진 우량기업의 매물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 이 틈을 시장지배력을 더욱 강화하는 기회로 삼은 것이다.

'잃어버린 10년'을 극복한 일본 기업들은 이후 호황으로 60조엔(약 800조원)이 넘는 자금을 보유한 것으로 파악된다. 더구나 엔화가치가 급등하면서 현금가치는 2배 이상 높아진 상태다. 이처럼 가공할 만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일본 기업들은 지난해 사상 최대인 710억달러 규모의 해외기업 인수·합병(M&A)에 성공했다. 분야도 금융, 제약, 석유화학 등 업종을 가리지 않았다.
축적한 실탄으로 세계 사냥 '되찾는 10년'


노무라홀딩스가 리먼브러더스의 아시아·태평양법인을 인수한 것은 신호탄에 불과했다. 미쓰비시UFJ파이낸셜그룹은 모간스탠리 투자은행부문을 인수했고 다이이치산쿄는 인도 최대 제약회사인 란벅시 인수에 성공했다. 석유화학업체 미쓰비시레이온도 최근 아크릴수지 원료인 메타크릴산 메틸모노마의 세계 최대 제조업체인 영국의 루사이트인터내셔널을 인수한다고 선언했다.



결국 대공황 이후 최악으로 꼽히는 현재 금융위기가 보수적 경영을 유지하며 막대한 현금을 보유한 기업들에 다른 기업을 매력적인 가격에 인수할 수 있는 호기를 제공한 셈이다.

임태윤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조정팀장은 "일본 기업들은 '잃어버린 10년' 동안 자금이 있어도 투자하지 않고 내핍경영을 했다"며 "그 결과 삼성전자 현대중공업 등 이 기간에 공격적인 투자에 나선 한국기업들에 반도체, 액정표시장치(LCD), 조선 등에서 추월당하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고 지적했다. 이런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최근 불황에도 불구하고 투자에 적극 나섰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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