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과 나누는 한잔의 와인, 그리고 여유

전두환 신한카드 부사장 2008.10.10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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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위크]전두환의 '나의 와인스토리'

추석이 지난 지 2주 만에 가을이 왔나보다. 금년에는 추석이 예년에 비해 빨리 온 탓에 이제야 벼들이 누런 빛깔을 띠기 시작한다. 날씨가 갑자기 서늘해지자 나무들이 제각기 색깔로 물들기 시작한다. 뉴스에서 본 백두산 붉은 단풍은 산중에 누군가 불을 놓은 듯하다.

몇해 전 보기 드문 맑은 날씨덕분에 환상적인 천지(天池)를 본 후 생전에 다시 이런 경치를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다소 감상적인 마음이 들었다. 하행길에 일반 관광객들이 갈 수 없는 등산로에서 들쭉열매를 뒤지다가 앉은 자리에서 자작나무 군락을 만났다. 속세에 찌들어 얼룩덜룩하고 외틀어진 자작나무만 보아 온 필자에겐 은색 나무줄기에 은은한 노란빛이 섞인 단풍잎이 어우러져 도도하게 서있는 그 나무들이 왜 귀족의 작위를 받았는지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었다.



금년 봄에 우리집 마당 가장자리에 몇그루 있던 자작나무를 뽑고, 봄이면 하얀 꽃이 피는 이팝나무를 심었다. 이젠 백두산 자작만이 그 기품을 간직한 채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 계수나무는 흔히 보이는 정원수 중에 가장 일찍이 단풍이 든다. 동그란 잎이 햇살을 받으면 옅은 붉은색을 둘러 싼 말간 노란색이 후광처럼 번진다. 바람이 불면 잎들끼리 부대끼며 타닥타닥 소리를 낸다. 이 처럼 좋은 가을을 물색없이 바쁘게만 사는 이유 중 하나는 겨울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겨울은 춥고 외롭다. 사람들은 긴긴 겨울을 나기 위한 양식 준비에 바쁘지만 정작 이 겨울에 가장 요긴한 것은 같이 얘기를 나눌 말동무가 아닐까?



유럽에서도 비교적 북쪽에 위치한 룩셈부르크의 겨울은 밤이 유난히 길다. 이곳 사람들은 주말이 되면 이웃들을 초대한다. 초저녁부터 시작된 파티는 밤늦도록 이어지고 손님들은 안주인이 준비한 음식에 배를 두드리며 먹어낸다. 온갖 수다가 이어지며 잡담 속에서 그들은 잃어버린 자아의 실존을 찾는다.

일상적인 대화중에서도 남자들은 그날 마시는 와인에 대한 이야기로 밤을 새운다. 와인이야기가 길어지는 이유는 참석자들이 와인 한병씩을 지참하여 손님이 많을 수록 다양한 와인이 준비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론은 항상 같다. 그들의 이웃이 만드는 모젤와인의 리슬링이 세계 최고라는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주말에 초대된 손님이 자정 전에 일어나면 결례(缺禮)가 된다. 새로 1시경이면 적당한 시간일 듯하다. 이웃들이 만나니 각자 집들은 엎어지면 코 닿을 데, 밖으로 나오면 이미 두텁게 깔린 음산한 안개와 차가운 공기가 그동안 얼마나 행복한 공간에 있었는지 실감나게 해 준다. 입김을 불며 인사를 나누고 돌아오는 길에 벌써 그들이 보고 싶어진다.


필자는 양지면으로 이사 오기 전에 송파구의 한 아파트에서 16년간을 살았다. 하지만 겨우내 긴 밤들에 몇번이나 위아래나 옆집 부부를 함께 초대했을까? 솔직히 고백하면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바쁘다, 특별한 관계가 없다, 공간이 좁다, 부인이 결사반대 한다 등 수많은 핑계거리가 있지만 사는 게 뭔지 잠시 생각해 볼일이다.

이번 겨울 그간 별로 관계없던 이웃들을 집으로 초대하고 싶다. 음식준비는 집사람 몫이다. 발끈하겠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설거지나 기타 일체의 뒤치다꺼리는 남자들이 맡겠다면 믿어줄까? 손님들은 와인 한병씩을 들고 올까? 번민꺼리가 많지만 손님들에게 한가지는 꼭 부탁드리고 싶다. 와인은 아무래도 좋지만 그날 고생할 안주인을 위한 꽃 한묶음은 꼭 준비하라고 말이다. 꽃과 함께 온갖 아양을 곁들인다면 우리들의 모임은 상당기간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중년의 여인들은 의외로 젊은 부인시절 보다 훨씬 더 소녀가 된다고 한다. 아이들을 키우는 일은 너무나 중요해 감상에만 빠져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아이들이 다 자라고 나면 뿔난 엄마들은 다시 소녀가 된다. 명품 핸드백 선물이 좋을까? 꽃이 좋을까? 와인을 평가할 때 전문가들은 항상 가격대비 품질을 평가한다는 점을 참고하길 바란다.

이웃이나 지금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 대한 예의 지키기나 배려는 선진국이 되기 위한 관건이다. 가을이 오는 길목, 지금부터 맹렬히 준비하여 한 겨울 밤에 낯선 이웃들을 초대해보자. 온 세상 금융시장이 요동을 쳐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요즘이지만 이번 겨울 우리는 또 다른 작은 기적을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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