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생의 꿈과 깨진 아메리칸 드림

성상현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 2008.10.05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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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위크]청계광장

소설 <허생전>은 미국이 독립하던 18세기 후반 조선 땅에서 쓰여진 이야기다. 남산골 선비 허생은 가난에 굶주린 아내의 질책에 10년 작정한 공부를 접고 장사에 나섰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허생은 장안의 제일 갑부인 변씨를 찾아가 "장사 밑천이 없으니 일만냥을 빌려달라"고 당당하게 청한다. 변씨는 일면식도 없는 거지 몰골의 선비에게 그 자리에서 일만냥을 내준다.

큰 돈을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빌려준 이유를 변 부자는 이렇게 말한다. "무릇 돈을 빌리러 오는 사람이라면 이것저것 약속을 길게 늘어놓으며 안심을 시키는 법인데 말이 간결하고 조금도 부끄러워함이 없으니 본래 제 살림에 만족하고 사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해보고 싶다는 장사도 작은 일이 아닐 것이다."



그 후 허생은 크게 장사를 하여 큰 돈을 벌고 빈 섬을 개척하여 집 없이 노략질로 살아가는 수천명의 도적들이 살만한 마을을 건설하고 빈민을 구제한다. 그리고 빌린 돈을 10배로 갚고 나서 다시 오막살이로 들어가 버린다. "만금이 어찌 도(道)를 살찌게 한단 말이오"라는 말을 남기고.

200여년도 넘게 지난 2008년 가을, 푸른 잔디가 깔린 하얀색 마이홈을 갖고 싶어하는 아메리칸 드림과 이들에게 모기지를 팔아 이득을 챙겨온 금융사들이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다. 타임지는 ‘탐욕의 대가(the price of greed)’라는 제하에 월스트리트에서 시작된 위기를 표지 기사로 전하고 있다. 고도의 금융공학 기법과 효율적인 경제시스템으로 무장하여 금융강국을 구축하자고 외치던 논객들이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로 시작된 신자유주의의 30년 역사가 이제 마감됐다는 진단을 내리기 시작했다. ‘파생금융상품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문화비평가들까지 가세하여 설익은 신자유주의의 장송곡을 노래할 것’이라는 시평까지 나오고 있다.



수천만 마이홈의 꿈을 수렁에 빠뜨린 금융상품이 수십만채의 가옥을 휩쓸어간 허리케인이나 쓰나미보다 무섭다는 것을 굳이 공부를 많이 해야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파생금융상품의 복잡한 구성논리와 경제법칙을 몰라도 기업이 지켜야 할 윤리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금도를 넘어선 장사는 사업이 아니라 사기라는 것은 굳이 금융전문가가 아니라도 알만한 일이다.

문제는 제도화된 시스템 속에서 행해지는 이윤추구 행동은 통제되기 어렵고 정당성을 의심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집 마련의 꿈이라는 고객 니즈를 만족시키는 것이 ‘소중한 가치’라는 신념 속에서 대출을 늘려왔고, 부실한 모기지를 파생금융상품으로 만들어 되팔았다. 전쟁의 포화나 뚜렷한 범법행위가 없어도 수많은 가계와 기업이 무너질 수 있는 것이다.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윤리의식이 차츰 어떻게 마비되어 왔는지, 수많은 전문가들의 ‘전문적 비즈니스’가 인류에 대한 범죄행위였다는 것이 밝혀진다.

1조달러의 국민세금을 월가의 위기관리에 투입해야하는 부시 대통령은 구제금융을 신속히 추진하기 위해 국민을 설득할 것이다. 1997년 환란의 와중에 있던 대한민국 대통령의 분주했던 모습이 떠오른다. 한국의 기침이 미국에 감기를 옮기지 않지만, 미국의 기침은 한국을 골병들게 한다. 진정한 금융강국이 되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한계와 국가의 역할, 기업 윤리와 사회적 책임에 대한 진지한 논의와 사회적 공감대가 필요하다.


허생과 변 부자가 보여준 배포와 믿음이 수백년 전 소설 속 이야기로 머물지 않아야 한다. 지속가능한 경제시스템의 큰 그림을 그리는 능력과 사회적 신뢰의 재건이 절실한 때다. 아직 비관하기엔 이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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