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 만수유했으니 세계로 공수거"

머니투데이 배성민 기자 2008.10.02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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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한부자]'장애인 대모'황연대 박사-'인재보국'이종환 회장

9월과 10월은 완연한 가을이자 결실의 계절이다. 봄에 뿌린 씨앗은 가을에 알곡으로 거듭난다. 특히 이번 가을에는 국내 거인들의 활동이 밴 알곡이 국내외에서 풍성한 수확으로 연거푸 이어지고 있다. 한국 최초의 장애인 여의사인 황연대 박사가 그렇고 맨손으로 굴지의 제약기업 종근당을 일궈낸 고 이종근 회장도 마찬가지다.

황 박사의 이름을 딴 ‘황연대 성취상’은 지난달 17일 막을 내린 장애인올림픽(패럴림픽)의 두 선수에게 주어졌고 범세계적으로 결핵퇴치에 기여한 이들에게 시상되는 고촌상(고 이종근 회장의 호)은 이번달 중순에 세번째 수상자를 내놓는다.



그동안 국내에서는 국내에서 제정됐지만 세계인을 대상으로 하는 ‘한국판 노벨상’은 나오지 않았다. 전쟁과 가난을 딛고 일어나느라 다른 이들은 돌아볼 틈이 없었다는 변명 아닌 변명도 있었다. 막사이사이상(필리핀 대통령 고 막사이사이의 업적을 기린 상)의 국내 수상자는 연거푸 나왔고 노벨상 수상자도 나왔지만 그 같은 상을 내놓겠다는 생각은 수십년간 영글지 않았다.

하지만 이 같은 풍토가 서서히 바뀌고 있다. 황연대 성취상과 고촌상 외에도 보험업계의 산증인인 고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의 이름을 딴 ‘신용호 세계보험학술대상’은 지난 97년부터 세계 보험발전에 기여한 이들에게 시상하는 일을 계속해 오고 있다. 장학사업으로 널리 알려진 이종환 관정교육재단 이사장은 관정아시아상을 제정해 아시아판 노벨상으로 키우겠다는 뜻을 밝혔다.



◇황연대 박사, 75그램 순금메달에 담긴 사연
지난 17일 베이징 장애인올림픽(패럴림픽) 폐막식, 불편한 걸음을 내딛는 한 한국인 여성이 파란 눈을 가진 두명의 출전선수에게 메달을 건넸다. 75그램의 순금 메달을 건넨 이는 한국 장애인들의 ‘대모’로 불리는 황연대 박사(전 한국장애인복지진흥회 부회장)였고 메달을 목에 건 이들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외다리' 여자 수영선수와 파나마의 시각장애인 육상 선수였다.

'황연대 성취상' 시상은 1988년 서울대회부터 폐막식 식전 행사로 치러졌으나 이번 대회부터는 공식행사 프로그램으로 채택됐다.

이번 성취상의 주인공은 교통사고로 무릎 아래를 잃은 수영선수 나탈리 뒤 투아(남아공)와 시각장애를 가진 육상 선수 사이드 고메스(파나마)였다.


하지만 수상자보다 더 부각되는 인물은 황 박사 자신이었다. 세살 때 소아마비로 장애인이 된 그녀는 역경을 극복하고 이화여대 의대를 졸업, 세브란스병원 소아과 의사가 된다.

의사로 일하면서 한국소아마비아동특수보육협회를 설립하고 정립회관 관장, 장애인고용촉진공단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장애인의 의료, 심리, 사회적 재활에 힘써왔다. 국내 장애인들의 대모로 불려온 그는 지난 1988년 봉사활동 등으로 받은 상금을 국제장애인올림픽위원회(IPC)에 기탁한다.



IPC는 30여년간 장애인들의 권익 향상을 위해 헌신해 온 그녀의 공적을 인정하고 이를 기리기 위해 `황연대 극복상'(극복상은 뒤에 성취상으로 이름이 바뀐다)을 제정했다. 88년 서울장애인올림픽 선수 위안행사에서 첫 시상식이 열렸고 세상에 알려졌다. 그뒤로는 폐막식 사전 행사로 시상식이 진행됐지만 이번에는 처음으로 폐막식 공식행사 중 하나로 치러진 것.

그녀는 "전 세계가 지켜보는 행사에서 한국인인 내가 직접 메달을 수여하게 돼 국제 무대에서 한국의 위상이 더 높아질 것으로 기대한다”며 “한국 선수들도 도전과 성취의 열정으로 모든 세계인을 감격시키길 바란다"는 소회를 밝힌 바 있다.

◇이종환 회장, 장학재단서 아시아판 노벨상까지
수천억원대의 장학재단으로 널리 알려진 관정 이종환 삼영그룹 회장이 아시아판 노벨상을 제정할 계획이라고 밝힌 것은 지난 6월이다. 그는 당시 “앞으로 우리 장학생들이 노벨상을 받도록 돕는 것은 물론 아시아의 노벨상과 같은 관정아시아상을 창설할 것”이라고 밝혔다.



올해 84세로 창업 세대 원로인 그는 2000년 당시 3000억원을 내놓으며 ‘관정이종환재단’을 설립해 세인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그는 2년 뒤 ‘관정이종환교육재단’으로 확대 개편하며 기금을 6000억원으로 불렸다. 이 회장 총재산의 95%에 이른다.

공익재단 전체로 보면 아산재단과 삼성문화재단 다음이지만 순수 장학사업만 펼치는 재단으로서는 국내 최대규모고 삼영그룹이 삼성이나 현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연매출 4000억원 규모의 중견그룹이라는 점에서 시선을 끌어왔다.

애당초 이 회장은 부의 사회 환원, 정치적 야망 등과는 거리가 먼 자린고비 회장님으로 알려졌을 정도로 악착같이 일해 부를 모으는 데만 진력했다.



솔선과 근검이 몸에 밴 탓에 점심시간에도 늘 자장면을 즐겨먹을 만큼 구두쇠로 알려져 있고 지금까지도 `자장면 회장'으로 불린다.

또 경비를 최대한 아껴 쓰도록 시시콜콜한 것까지 직접 챙겨 직원들에게는 여전히 이면지를 사용하라고 채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최고 시설을 들여온다든지, 최고 인재를 데려오고 키우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 인재에 대한 그만의 혜안이자 심미안의 발로다. 그의 재단은 매년 장학금으로만 150억원을 지급하고 있고 이질화된 남북한 언어를 서로 이해시키기 위한 ‘남북통일말 사전'을 발간하는 등 남북교류협력에도 기여하고 있다

그는 “내가 돈을 벌 당시에는 세상은 격렬한 경쟁시대라 돈을 버는 데 거칠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하며 “내 인생에도 선악의 양면이 있겠지만 남은 생은 선으로 악을 씻는 일에 더욱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돈 버는 일에 불가피한 악이 섞였다고 토로하는 그에게 선은 장학, 육영, 공익재단 등 사회사업인 셈이다.



‘돈을 놓으니 마음이 편해 좋다’는 이 회장이 아시아 인문학자와 자연과학자에게 100만 달러(약 10억 원)를 주는 관정아시아상을 만들고 오는 2010년 첫 수상자를 선정할 예정이다. 인문 분야로는 세계적으로도 드문 금액이며 노벨상 상금 수준에 맞먹는다. 그는 수십년 후 그의 장학재단(관정교육재단)을 통해 공부한 이가 관정아시아상을 받는 행복한 미래를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 신용호·이종근 회장, 보험발전·질병퇴치 한우물
황연대 박사나 이종환 회장과 달리 고 신용호 교보생명 회장이나 고 이종근 종근당 회장은 자신들이 일가를 이뤘던 부분에 대해서 시상하는 상의 제정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신용호 세계보험학술대상’은 고 신 회장의 생전인 97년, 고촌상은 고 이 회장의 사후인 2006년에 제정됐다. 보험업계와 제약업계의 대부다운 그들의 자신감이 배어있는 것.

‘고촌상’은 지난 1941년 종근당을 창업한 뒤 당시 수입에 의존하던 결핵약을 자체 기술로 생산, 저렴한 가격에 국내 시장에 보급하는 등 평생 결핵퇴치에 이바지했던 종근당 창업주 고촌(高村) 이종근 회장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만든 국제적인 상이다. 결핵퇴치에 공헌한 개인이나 기관, 단체를 선정해 매년 시상하며 수상자에게는 총 10만달러 상당의 상금도 함께 지원한다. 이 회장은 ‘그동안 기업에서 얻은 많은 이익을 사회와 국가를 위해 유익하게 쓰는 것이 당연하다’는 유언을 남겼고 그의 유지를 이어받은 고촌재단은 장학사업과 학술연구 지원, 고촌상 등에 그의 뜻을 새기고 있다.



'신용호 세계보험학술대상'은 세계보험협회가 세계 처음으로 교육보험을 개발하는 등 보험산업의 새로운 발전모델을 제시한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상이다. 시상은 관례적으로 신용호 회장의 아들인 신창재 현 회장이 맡고 있다.

신용호 회장은 광화문 금싸라기 땅에 대형서점(교보문고)을 만들어 독서문화를 보급하는 한편 문학도 육성을 위해 대산문화재단을, 농촌문화 진흥을 위해 농촌문화재단을 만들었다. 유가족이 1830억원을 상속세로 납부한 것도 그의 신념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글로벌 보험상에 신용호 회장이 어울리는 것은 미래에 대한 저축인 보험과 교육에 대한 신념이 결합된 결과다.

이종환 회장은 그의 자서전 '정도' 마지막 장의 소제목을 통해 신념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 바 있다. '만수유(滿手有)했으니 공수거(空手去)하리!(손에 가득 쥐어봤으니 비우고 떠나리)'



황연대, 이종환, 신용호, 이종근 그들의 삶과 흔적은 한강의 기적으로 상징되는 한국의 성공담이 배어있으면서도 또 범세계적이다. 그야말로 "'한국서' 만수유했으니 '세계로' 공수거하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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