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인레스 금속과 파란색으로 만들어진 차가운 느낌의 간판. 문 앞과 카운터, 엘리베이터 앞 유리문에서 3중으로 신분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합리적인 독일사람과 철저한 금융인의 면모가 겹쳐졌다.
◇CIB가 강점? 모르는 말씀!= 기업금융 투자은행(CIB·Corporate & Investment Bank)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녔던 도이치방크. 정작 도이치방크는 이런 꼬리표에 동의하지 않는다. '도이치=CIB'라는 공식을 뒤엎는 대신 5가지 핵심사업을 내세웠다.
지난주 독일내 최대 소매금융 장악력을 자랑하는 포스트방크 지분 30%를 인수하며 강한 의지를 보인 도이치는 이제 ③개인·중소기업거래(Private&Business Clients·PBC)와 ④개인자산관리(Private Wealth Management)를 자신들의 강점으로 어필하기 시작했다.
PBC는 특히 아시아와 폴란드에서 급성장하고 있다. 지난 2분기 때는 여기에서만 30억유로, 상반기에는 총 70억유로의 순이익을 냈다. 더불어 아시아 백만장자 대부분을 차지하는 친디아(중국+인도) 진출에 가속도를 내고 있는 도이치는 ⑤자산관리(Asset Management)에도 공을 들이는 모습이다. 2005년 중국 화샤은행 지분을 사들인 도이치는 인도에도 8개 지점을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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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치가 CIB를 벗어나 소매금융에 똑같이 공을 들이기 시작한 건 이미 2~3년 전 얘기다. 도이치 대변인 니더마이어씨는 CIB를 특화하기 위한 도이치의 노력이 뭐냐는 질문에 손사래를 친다. 도이치는 더 이상 CIB에 국한된 은행이 아니란 설명이다.
그는 "어떤 분야가 다른 분야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은 없다. 도이치방크는 5가지 핵심사업 모두에 같은 노력을 쏟고 있다"고 잘라 말했다. "2000년대 초반 닷컴붐 이후 지나친 투자를 필요로 하는 사업은 처분하고 강한 분야에만 집중해왔다"고 덧붙였다.
이런 도이치의 '변신'은 한 분야에만 안주할 수 없는 글로벌 금융상황을 잘 반영한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리먼브러더스와 메릴린치도 비슷한 교훈을 남겼다. 도이치는 하나의 큰 열매보다 여러 개의 작은 열매를 택했고 그 열매는 견실하게 익고 있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 도이치방크.
M&A를 크게 완전히 틀을 바꾸는 방식(merger)과 작은 회사를 살짝 얹는 방식(bolt-on)으로 나눈다면 도이치는 후자를 주로 사용해왔다. 이로써 많은 문제가 파생될 수 있는 M&A의 위험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니더마이어씨는 "도이치는 이미 사업을 벌이고 있는 지역이나 상품과 관련해 영역을 확장하고 싶을 때 작은 규모의 M&A를 한다"고 말했다. 예컨대 2004년 러시아 투자은행 UFG 지분 40%를 인수할 당시 도이치는 이미 러시아에 진출한 상황이었다. 접근성을 따졌을 때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신중한 판단에서 이뤄진 선택이었다. 지난 7월 네덜란드 ABN 암로(Amro)의 지분을 사들인 것도 같은 맥락.
이런 방식이라면 구조조정도 필수사항은 아니다. 도이치는 지난 몇년 새 수차례의 작은 M&A를 거치고도 직원수가 늘었다. 사람을 자르기보다 더 충원했다. 큰 규모의 인력이동이 없어서 불필요한 분쟁이 줄었고 직원간 융합속도도 빠르다.
그중에는 굵직한 M&A도 있다. 1998년 투자은행으로 이름을 날리던 뱅커스 트러스트(Bankers Trust)를 인수한 것이 대표적이다. BT는 신흥시장에서 큰 손실을 입은 상태였지만 도이치에겐 절호의 찬스였다. 인수금액은 101억달러로 당시 미국금융기관을 인수하는 외국은행으로선 사상 최대 금액이었다.
결과는 대성공. 유럽은행으로서 꿈의 개척지인 미국에 진출하는 발판이 됐을 뿐 아니라 BT가 보유하던 정보기술과 인프라를 확보하는 계기가 됐다. 여기에는 물론 사전정보 입수와 분명한 인수 목적이 뭔지에 대한 끊임없는 되새김질이 동반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