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한 Summer Wine 쇼비뇽 블랑

전두환 신한카드 부사장 2008.09.04 16:00
글자크기

[머니위크]전두환의 '나의 와인스토리'

말복이 지나도 기승을 부리던 여름 더위가 광복절 연휴동안 계획에 없던 휴가를 떠났는가 보다. 서늘해진 아침에 계절이란 참으로 신통하다는 생각이 든다. 마당에 때 이른 낙엽들이 몇 장 보이기 시작한다. 촌음(寸陰)을 아껴서 공부하라는 주자(朱子)의 시구가 생각난다.

少年易老學難成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을 이루기는 어려우니)
一寸光陰不可輕 (짧은 시간이라도 가벼이 여기지 마라)
未覺池塘春草夢 (연못가 봄풀은 아직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는데)
階前梧葉已秋聲 (섬돌 앞 오동나무는 벌써 가을바람 소리를 내느니)



어느 때인가 모교에 들린 박정희 대통령께서 써 주었다는 이 글이 전신이 대구사범이었던 필자의 고교시절 교장실에 걸려 있었다. 소년의 나이 이제 오십대 중반을 넘겼으나 아직도 일촌광음(一寸光陰)의 무게를 제대로 아는가 하는 자책감이 든다.

봄부터 겨울까지의 사계절의 분명한 변화와 어디서나 사방을 두른 산들이 보이는 이 땅은 우리가 받은 축복들이다. 이 둘의 축복이 어우러져 멀리 보이는, 봄 산과 겨울 산의 정취를 값으로 매길 수 없다. 배럴당 150달러나 하던 석유가 엄청나게 매장된 중동 모래땅 모두와 맞바꾸자는 제의가 온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는가? 필자는 반대한다.



하지만 계절의 변화는 많은 비용을 수반한다. 겨울이 되기 전에 가족들의 옷과 먹을 양식을 준비하지 못하면 우리는 생존할 수 없다. 4년여 동안 국내에 오지 못하고 귀국하던 날 공항에서 반가운 얼굴들을 보면서 느낀 두 가지 중 하나는 봄 날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표정이 상대적으로 무척이나 단호해 보인다는 점이었다.

생존을 위한 경쟁에 익숙한 탓이 아닐까? 또 다른 하나는 여성들의 화장이 전반적으로 좀 더 짙게 느껴져 가장무도회 때 가면을 쓴 것처럼 느껴졌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6월 초입이면 벌써 여름이 온다. 우리나라의 여름 날씨는 매서운 겨울만큼이나 혹독하다. 높은 기온과 습도를 이기기 위해 선조들은 보양식을 이 계절에 많이 먹었다. 복날이 되면 서민들은 보신탕, 선비들은 민어매운탕을 위해 솥을 걸었다. 필자는 시원한 화이트 와인을 준비한다. 금년 여름엔 뉴질랜드산 쇼비뇽 블랑(Sauvignon Blanc)을 주로 마셨다.


로마병사들은 원정을 가면 주둔지에 참호와 우물을 팠다. 게르만족이 살던 북유럽은 지금은 세계 문화의 중심에 있지만 당시에는 문화시민인 로마인들이 살기에는 너무나 부족함이 많은 야만의 세계였다.

이미 수돗물에 익숙한 로마병사들은 배탈을 방지하기 위해 마실 물에 와인을 타서 마셨다. 아마 살균력이 더 나은 화이트 와인을 사용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 연유로 로마군단이 주둔하면 기후여건이 어려운 지역에도 포도밭을 먼저 만들고자 애썼다.



봄 처녀의 이미지를 가진 생기발랄한 쇼비뇽 블랑은 야생, 야만을 뜻하는 불어 어원 Sauvage가 말해 주듯 신선한 푸르름으로 숨이 턱턱 막히는 우리의 여름을 잠시 동안 잊게 해준다.

시원함을 만들기 위해 프랑스 르와르강 유역의 상트르(Centre)나 뉴질랜드 남섬에 있는 말보로(Marlborough)와 같이 서늘한 지역에서 만들어진 와인이 보다 선명한 풀 향기를 잘 표현한다. 때때로 수확시기를 놓치거나 생산량이 과할 경우 풋내가 나거나 별다른 특징 없이 빈약한 와인이 되어 우리를 실망시키기도 한다.

쇼비뇽처럼 스테인리스 통에서 숙성한 신선한 아로마를 즐길까? 아니면 보르도 일부에서와 같이 오크통에서 숙성된 원만하고 스타일리시한 쇼비뇽 와인을 마실까는 또 다른 즐거운 선택이다.



평생 기타를 만들어 온 기타제작의 명인 엄태흥 씨는 “저음이 잘 어우러지는 내 기타는 아무래도 나이든 손님들이 좋아합니다. 통통 튀는 고음에 주안을 두는 젊은 고객은 다른 사람들의 작품을 주로 찾지요” 라고 말했다. 이번 여름 필자는 젊음의 와인을 즐긴 셈이다.

이 기사의 관련기사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