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적 30만㎢, 인구 9000만명의 이 나라는 20년 장기독재를 거친 뒤 1986년 민주화 항쟁을 통해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등 우리나라와 비슷한 길을 걸어왔다.
이 나라는 1960년대까지 우리나라보다 훨씬 풍요로웠던 필리핀이다. 무엇이 우리나라와 필리핀 사이에서 이 같은 대역전극을 만들어 냈을까.
월든 벨로 필리핀대 교수(사회학과)는 "한국에서는 독립 후 정부 주도로 제한적이나마 실질적 토지개혁이 있었지만 개혁적 리더십이 없었던 필리핀에서는 토지개혁이 형식에 그쳤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필리핀에서는 지주계급과 지배계급이 온존하고 토지가 효율적으로 쓰일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필리핀에 주재했던 한 관료는 "필리핀 정부가 대중적 인기를 얻기 위해 기업에 지나치게 높은 수준의 고용보험 의무를 부과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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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관료는 "이 결과 기업들이 고용보험 가입 의무가 발생하기 전에 노동자들을 해고하면서 고용 안정성이 저해되고 숙련 노동자로 클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포퓰리즘적 노동정책의 부작용이다.
그렇다면 자원빈국인 한국이 필리핀을 추월해 멀찌감치 따돌릴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이 찾은 이유는 크게 3가지다. △정부 주도의 대규모 시설투자 △해외차관을 활용한 토종기업 육성전략 △높은 교육열이 낳은 고급 인적자원 등이다.
김신행 서울대 교수(경제학부)는 "수출주도형 개방경제를 지향한 것도 중요하지만 수출로 벌어들인 외화를 고속도로, 항만 등 사회간접자본(SOC)과 중화학 공업에 투자한 것이 결정적이었다"고 말했다.
이를 통해 장기적인 성장잠재력을 확충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김 교수는 "민간이 위험 부담 때문에 할 수 없는 대규모 투자를 때로는 정부가 대신해서 과감하게 집행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한 자산운용사 사장은 "기간산업망 확충을 위해 해외자금을 끌어오면서도 지분투자 대신 차관만 들여와 토종기업을 육성한 것이 주효했다"이라며 "만약 해외로부터 지분 투자를 받고 경영권을 넘겼다면 멕시코 등 중남미 나라들처럼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정희 정부에서 포항제철(현 포스코) 설립 때 지분투자 대신 차관만 들여온 것이 대표적이다.
인적자원도 빼놓을 수 없다. 백용호 공정거래위원장은 "과거 서울대 이공계의 커트라인(최저합격점수)을 보면 1960년대 최고 인기학과는 화학공학과, 건축과, 토목과였고 70년대는 기계공학과, 80년대는 전자공학과, 90년대는 의대였다"고 소개했다.
백 위원장은 "여기서 배출된 인재들이 70년대 석유화학 및 중동 건설 붐, 80년대 조선업 성장, 90년대 정보기술(IT) 부문 성장을 이끌었다"고 말했다.
외국은 산업이 먼저 발전하고 그쪽으로 우수한 인력이 가지만 우리나라는 우수한 인력이 먼저 길러지고 그들이 주력산업을 만들어 간다는 설명이다. 이에 비춰 "앞으로는 우수한 인력이 집중된 의료, 바이오 분야를 주력산업으로 키워야 한다"고 백 위원장은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