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환율정책에 대한 시장 우려가 더욱 커지고 있다. 7일 기획재정부는 "보유외환을 풀어서라도 환율시장을 안정시키겠다"고 공언했는데, 시장은 오히려 "환투기 세력에 또다시 기회를 줄 것"이라는 반응이다. 비록 한국은행 등에서 반대해 실제 도입여부는 불투명하지만, 공연히 불안감을 조성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패 보여준 게임..즐거운 환투기세력=정부의 환율정책은 이중성을 갖고 있다. 상반기에 "환율상승 용인', 하반기엔 "환율하락 유도"를 강조했다. 환율정책을 '투명하고, 일관된 방식(?)'으로 관철시키겠다고 했다. 환투기세력은 이전에 기대할 수 없던 '예측가능성'을 제공받았다.
지난 3월 17일에는 환율이 무려 31원 이상 뛰었는데, 이튿날인 18일에는 15원, 보름도 지나지 않은 3월 25일에는 20원 이상 급락했다. 이 때문에 외환시장은 단기 패닉상태에 빠졌다. 지난 5월 8일에 는 21원 이상 뛰는 등 급등락 양상은 쉽게 멈추지 않고 있다.
이런 토양은 환투기 세력에 최고의 먹잇감을 제공하고 있다. 정부가 마음먹은 환율 목표치를 '깔끔하게' 보이도록 한 상태에서 환율이 급등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잘만 활용하면 대박이다'는 인식이 환투기세력에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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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시장 한 전문가는 "딜러들이 가장 대응하기 어려운 장은 횡보하는 장인데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급등락이 지속되며 가장 선호하는 시장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며 "최근 외환시장은 기업이나 증시에서 는 예측 또는 대응하기 어렵고, 투기세력 등 외환딜러만 선호하는 장세"라고 말했다.
다른 외환딜러는 환투기세력 입장에서 환율방향이 정해진 시장은 '들어가면 남는 장사'를 하는 곳"이라며 "목표한 환율을 유도하기 위해 정부가 실탄을 소모할 때 정부의 가이드라인의 범위 안에만 움직이면 대규모 손실 없이 수익을 거둘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고래싸움에 새우 등 터지고=한 선물회사 출신 외국계 채권 매니저는 정부의 환율정책에 대해 "없는 사람의 돈을 빼앗아 있는 사람에 줬다"고 말했다.
환투기세력은 심지어 정부의 의지를 시험하는 대담성도 보이고 있다고 한 외환딜러는 말했다. 지난 3월 말에 정부의 환율용인 발언 이후 "얼마나 올릴까 두고 보자"며 환투기세력은 맹공격을 퍼부었고, 이후 "여기까지였구나"하며 신속하게 그 밑으로 빠졌다는 것.
정부는 그러나 유가급등 등으로 스태그플레이션 우려가 심각해지자 갑작스레 '환율하락 유도'로 선회했다. 한 증권사 외환 전문가는 "환투기세력들은 이를 예상해 기존과 다른 매매전략을 짜놓고 기다렸다 "며 "그들 입장에서 정부의 환율정책은 너무나 예측가능하게 움직이고 있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상당수 기업들이 큰 손실을 입었다. 대형 증권사 스트래티지스트는 "정부에서 환율상승을 용인하겠다고 굳이 공개 천명하지 않았어도 환율은 1050원 수준까지 꾸준히 올랐을 것"이라며 "하지 만 정부의 공식 개입 이후 환율이 갑자기 두 단계 점핑을 거듭하며 순식간에 치솟았다"고 설명했다.
이는 결국 환헤지를 했던 기업들에 커다란 충격을 안겼다. 특히 환율헤지상품인 KIKO(키코)에 가입한 기업들에겐 그야말로 직격탄이었다. 환율이 (정부 탓에) 단기급등했고, KIKO에 가입한 기업들은 계약금액의 2~3배를 시장가보다 낮은 지정환율로 팔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환율상승으로 대기업 수출 가격은 높아졌지만, 중소기업은 KIKO와 같은 파생상품의 유혹에 노출된 채 고통을 겪고 있다. 실제 상장사들의 경우 공시 의무 등으로 파생상품 손실을 고백하고 있는데, 비상장사들의 피해는 그 이상일 것이 분명하다. 몇몇 잘 나가는 수출 대기업을 위해 중소기업을 희생시켰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한 외환딜러는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을 비롯해 외환당국자들은 과거 변동환율제 시절의 추억을 갖고 있는 것 같다"며 "그때에는 정부의 입김만으로 시장에 영향을 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시장이 완전 개방된 상태에서 정부 개입시 어느 정도의 물량 동원이 필요한지조차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시스템이 달라지고 시장 규모도 커졌는데, 여전히 '우리가 나서면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는 게 가장 큰 문제 아닌가"고 되물었다.
◇길을 터주니 고마울 밖에=신동준 현대증권 채권팀장은 "신 팀장은 "달러를 갖고 나가고 싶은 외국인의 경우 정부가 외환시장을 아래로 눌러주면 나가기 더 좋다"며 "지금은 이머징 마켓의 투자비중을 줄이고 특히 한국과 대만 같은 국가비중을 줄이는 타이밍인데, 정부에서 방어한다고 달러가 나가지 않을 것으로 보는 건 순진한 생각"이라고 말했다.
금융시장 불안으로 외국인이 달러를 거둬들이려는 때에 정부에서 환율을 낮추겠다며 달러를 팔아줬다는 시각이다. 어차피 나갈 외국인의 마음을 돌이키기는커녕 손쉽게 빠져나갈 매물만 대 줬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