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할머니들이 젊어진 비결

머니투데이 이경숙 기자 2008.05.31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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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머니,이로운 소비]<5-1>서라벌찰보리빵이 만든 행복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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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서라벌찰보리빵의 젊은 할머니들.↑경주 서라벌찰보리빵의 젊은 할머니들.


↑서라벌찰보리빵↑서라벌찰보리빵
팬케이크 향? 아니 그보다는 더 담백하고 고소한 향이 은은하게 혀 밑을 자극한다. 무언가에 대한 그리움이 몰려온다. 밖에서 놀다 허기진 배로 뛰어든 부엌의 온기 같은 것, 보리밥 짓던 어머니 가슴에서 나던 향기 같은 것.

경주의 ‘서라벌찰보리빵’ 가게 앞에 가면 그 향기를 맡을 수 있다. 희고 고운 볼과 꽃잎 같은 입술의 어머니들이 만든 향기다.



10여명의 직원이 모두 50대 같은 외모이지만 실은 60대 중반 이상 70대 어르신들이다. 무슨 힘이 할머니들을 어머니의 '동안'으로 돌려놨을까. 뭔가 남다른 묘약이라도 있는 걸까.

26일, 경주 황오동 서라벌찰보리빵 가게에 가서 다짜고짜 부엌부터 쳐들어갔다. 냉장고를 열었다. 매일우유 1등급 생유, 대두식품의 ‘고운앙금’ 팥소가 단정하게 놓여 있다.



찬장을 봤다. 백화수복, 해표 식용유, 코시스 바닐라에센스가 얹혀 있다. 씽크대 서랍 안엔 서강유업의 낙우밀 전지분유가 들어 있다. 찬장 옆으로 신경주농협의 찰보리분말 십여포대가 쌓여 있었다.

“이 근처 휴경지 이용해서 농협에서 무농약으로 키운 거라예. 수입산은 절대 안 써요.”
↑맨위부터 빵재료로 들어가는 <br>
신선한 계란, 무농약 찰보리분말,<br>
1등급 우유. ↑맨위부터 빵재료로 들어가는
신선한 계란, 무농약 찰보리분말,
1등급 우유.
김춘선(64) 할머니였다. 그는 2005년 서라벌찰보리빵이 개업할 때부터 일한 창업 멤버다.

“우리 찰보리빵은 밀가루를 전혀 안 써요. 100% 찰보리를 쓰니까 영양이 풍부해요. 아침 대신 먹어도 좋고요. 버터를 안 써서 트랜스 지방도 없어요. 방부제도 안 써요.계란도 한 판에 3800원짜리, 좋은 것 신선한 걸 써요.”


김 할머니가 양손에 계란을 들고 톡 치니 탱글한 노른자, 말간 흰자가 반죽그릇으로 떨어졌다. 할머니의 얼굴에서 자부심이 느껴진다. 어쩐지 낯익다. 맞다. 우리의 어머니들이 당신의 부엌에 서서 짓는 표정이다.

점포 쪽에서 나직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갑내기 친구인 안귀순, 최흥수(71)할머니가 빵 상자를 접으며 나누는 대화 소리였다.

슬쩍 곁으로 다가가 상자를 보는 척 딴청을 부리면서 엿들었다. “십년 전엔가 아무개한테 들은 얘긴데 어떤 양장점에선 블라우스가 100만원이나 한다더라”는 내용이었다. 부엌에서 김 할머니가 나와 불쑥 끼어들었다.

“에이, 블라우스 하나에 100만원짜리가 어딧능교.”

“그런가. 그게 높은 사람들 세계라 카던데.”

마실 나온 처자들 같이 호호깔깔 하던 분위기가 갑자기 경건해졌다. 돌아보니, 이상운(30) 간사가 빵 굽는 기계에 반죽을 담고 있었다.

신라문화원 경주시니어클럽에서 파견된 그는 이 사업을 위해 경주현대호텔과 경주서라벌대 호텔조리학과 전문가들로부터 제빵기술을 전수 받았다.

김 할머니가 식용유를 살짝 바른 열판 위로 반죽을 동그랗게 붓고 뚜껑을 닫았다. 침묵이 점포에 흘렀다. 2분 후, 알람이 ‘삐삐’ 울렸다. 김 할머니가 나무뒤집개를 드니 순식간에 빵반죽들이 홀랑홀랑 뒤집혔다.

다시 2분 후, 갈색빛으로 노릇노릇 구워진 보리빵들이 쟁반에 담겨 나왔다. 달콤한 향에 다시 입안에 침이 고였다.
↑서라벌찰보리빵 일하는 풍경.<br>
맨위부터 김 할머니가 빵을 굽고, <br>
황 할머니가 빵을 식히고, <br>
안 할머니와 최 할머니가 팥소를 <br>
넣고 이 간사가 빵을 팔고 있다. ↑서라벌찰보리빵 일하는 풍경.
맨위부터 김 할머니가 빵을 굽고,
황 할머니가 빵을 식히고,
안 할머니와 최 할머니가 팥소를
넣고 이 간사가 빵을 팔고 있다.
선풍기 바람에 식힌 빵들 사이로 안 할머니가 팥소를 넣는데 걸린 시간은 1~2초. 최 할머니가 그것을 식품용 OPP봉지에 넣는데 1~2초. 30년지기라는 두 할머니가 호흡을 맞추니 3~4초에 하나씩 찰보리빵이 완성되어 나왔다.

“저는 언니들 따라가려면 멀었어요. 손놀림이 저렇게 안 나와요.”

올해 초부터 이 일을 시작했다는 황명자(64) 할머니가 빵봉지 입구를 붙이며 말을 이었다. “제가 늦게 시작했지만 이렇게 같이 일하니까 너무 재밌어요. 형님들한테 많이 배워요. 저도 손이 빨라져야 할텐데.”

이 간사는 “자동기계로 포장하는 것보다 수작업 포장이 더 청결하다”고 자랑했다. 빵이 공기에 노출되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갓 포장된 빵 하나를 뜯었다. 한 입에 들어가는 크기였다. 신선한 향이 입안을 채웠다. 빵은 고소하고 팥소는 촉촉했다. 팬케이크보다는 달지 않고 일반 보리빵보다는 찰진 맛이었다. 나도 모르게 손이 다른 빵 봉지를 뜯고 있었다.

서라벌찰보리빵은 경주 내 30여개의 경쟁점포 중 맛으로나 판매량으로나 다섯손가락 안에 든다. 무농약, 무방부제에 맛이 담백해 주변 사찰에서 대중공양물로 대량 매입해가기도 한다.

이곳 단골인 김형진 현대증권 경주지점장은 "어머니 같은 분들이 정갈하고 깔끔하게 만드는데다 웰빙식품이라 고객 선물, 어머니 선물로 잘 활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주문이 는다고 서라벌찰보리빵 운영자인 신라문화원의 경주시니어클럽이 돈을 버는 건 아니다. 수입은 모두 양질의 재료와 할머니들 일자리 창출에 쓰인다. 돈 벌려고 빵을 굽는 게 아니라 일자리를 주려고 빵을 굽는 것이다.

이곳 할머니들이 한달에 받아가는 돈은 20만원에서 60만원 정도. 벚꽃철에 주문량이 많아지면 많이 일해 많이 받아가고 비수기인 여름, 겨울에 주문이 줄면 급여도 줄어든다.

이 때문에 서라벌찰보리빵은 심지어 비수기에도 매일 빵을 굽는다. 할머니들께 시급을 주려는 배려다. 팔고 남은 빵은 경주대자원, 천우자애원 같은 아동시설과 양로원에 간식으로 기증한다.

이러다 보니 지난해까지 3년간 적자를 피하지 못했다. 이 간사는 “지금은 한달 평균 800~900상자씩 주문이 들어오는데 1000~1200상자로만 주문이 늘어도 여유롭게 할머니들 시급을 드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원래 애니메이터였던 그는 이제 빵을 위해 뛴다. 반죽부터 배송, 회계와 관리, 심지어 홍보동영상의 애니메이션까지 못하는 일이 없다. 그의 파스텔 애니메이션에서 일에 대한 애정이 묻어난다.

빵이 더 팔린다고 그의 급여가 늘어나진 않지만 "어르신들 일 많아져 돈 많이 버시게 되는 게 좋아서" 그렇게 뛴단다. 이곳 할머니들 중엔 남편 없이 시어머니, 친정어머니를 모시면서 실질적 가장으로 사는 분들도 있다.

그러면 '일'이 할머니들을 젊어지게 한 묘약인 것일까? 한 가지가 더 있다. 진병길 신라문화원장은 "어르신들이 일하느라 새로운 친구를 만나시면 젊어지시더라"고 귀띔했다. '친구'와 '일'이 동안의 묘약이다.

맛 있고 몸에 좋은 서라벌찰보리빵을 먹으면 경주의 할머니들이 젊어진다. 택배주문번호는 054-777-0070(공공칠빵). 인터파크 내 희망소기업 몰에서도 살 수 있다. 1개 400원, 32개 1만2000원.
↑서라벌찰보리빵전경.↑서라벌찰보리빵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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