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 한잔이면 행복하거늘...

전두환 신한카드 부사장 2008.06.05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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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위크]전두환의 '나의 와인스토리'

오월의 밤이 조금 깊어져 사방이 고요해지면 우리 마을은 인기척 없이 개구리 소리만이 요란해진다. 서울시내에서 많이 떨어져 있지 않지만 집 주변의 논밭들에 농약을 거의 쓰지 않아 자연생태가 잘 보존되고 풍부한 먹이 덕분인지 백로들도 날아들고 여름엔 논두렁에서반딧불도 볼 수 있다.

논밭들의 땅값이 너무 올라 시세를 환산하면 농부들이 농사에 애착을 갖고 마음을 다잡기가 어려워진 탓이 아닐까 생각한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한 가지 측면에서만 좋다거나 나쁘다를 평가하기가 어렵다.



지난주부터 마을 입구 정문 앞 조그만 로터리에 방이 붙었다. "푸르메 마을 체육대회 개최 5월24일 토요일 15:00 많은 참석바랍니다." 시골마을에서 제일 중요한 모임은 운동회가 아닌가? 회사의 행사를 마치고 좀 늦게 참석했다.
뭐든 한잔이면 행복하거늘...


초등학생과 그 보다 더 어린 아이들이 20여명 모여 웅성거리고 이리저리 위태롭게 뛰어 다닌다. 이 또래의 아이들이 이렇게 많이 한 동네에서 같이 놀 수 있는 마을이 또 있을까 싶다. 동네 아이들이 다니는 제일초등학교는 한 학년이 한반으로 되어 있어 아이들끼리 한결 더 친해 보인다.

약 90호가 되는 양지면 푸르메 마을은 마을 한 귀퉁이에 있는 우리 집 맞은편에 제법 큰 마당이 있다. 어린이용 조그만 축구장(골대는 핸드볼 시합용이다)과 족구장 그리고 가구당 한 평짜리 앙증맞은 텃밭들이 도열해 있다. 우리는 김치와 뒷집 할머니가 당신만의 비법으로 손수 삶아 낸 돼지고기 수육을 안주 삼아 막걸리를 마셨다.
마당에 솥을 걸고 나무로 불을 때어 만든 고기는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누룽지를 모아 만들었다는 막걸리는 짙은 숭늉 같은 색깔을 띠고 구수한 뒷맛이 속을 편안하게 한다. 플라스틱 통째 들고 한잔씩 서로 권하는 맛이 정겹다.



누군가 호루라기를 불고 아이들은 엄마들과 피구게임을 한다. 게임방식도 잘 모르는 아이들이 그냥 좌로 우로 천방지축 뛰어 다니며 비명을 지른다. 다음은 아이들을 두 편으로 갈라 이어달리기 시합이다. 서너살 아이도 좀 더 큰 애들도 있는 힘을 다해 달리느라고 얼굴이 발개진다.

아빠들은 박수를 치며 주고받은 막걸리 덕에 빨개졌다. 줄 다리기 시합 준비를 하는 것을 보며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어제 밤 여독이 상기 가시지 않아 눈이 거물거린다. 영차 영차 줄다리기를 이긴 편의 환호성이 온 동네를 울린다.

막걸리는 가장 역사가 오래된 우리의 민속주다. 알코올 도수 6~7도, 단맛, 신맛, 쓴맛, 떫은맛의 조화를 음미할 수 있다. 더운 여름의 시원한 감칠맛은 또 어떠한가? 하늘로 돌아가 이제 천상의 시인이 된 천상병의 “막걸리”가 생각난다.


남들은 막걸리를 술이라 하지만
나에게는 밥이나 마찬가지다
막걸리만 마시면 배가 불러지니 말이다.
중 략
나는 막걸리를 조금씩만
마시니 취한다는 걸 모른다.
그저 배만 든든하고
기분만 좋은 것이다.

쌀로 빚었거나 포도로 만들었던 간에 와인 한잔이면 족하고 기분이 좋은 것이다.
귀천(歸天)의 시인처럼 순수하고 소박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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