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아들이 반항할 때 대처법

김기홍 부산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2008.05.23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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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을 위한 협상학]포기의 미학에 대해

사춘기 아들이 반항할 때 대처법


“왜 야단을 치느냐? 내가 뭘 잘 못 했느냐?” 제 2 의 사춘기에 접어든 고등학생 아들이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잔소리만 하고 잘못만 지적하는 아빠(혹은 엄마)의 태도가 참을 수가 없단다.

이 험난한 세상을 제대로 살아가기 위한 자세 하나 잡아주려는 부모의 태도가 영 고까운 모양이다. 그러니 주장한다. “나는 다 컸다.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하니 간섭하지 말아 달라.”
 
도날드 트럼프의 비전을 현실에서 펼친 그의 반려자 조지 로스는 그의 협상경험을 살려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 겨우 2살로 접어드는 아기들은 탁월한 협상가들이다.’ 왜 그럴까? 당연하지 않은가?



아기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울고 투정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제대로 된 부모라면 이 아기들을 얼르고 달래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을 수 없다.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을 종일 울게 내버려두면 혹 잘 못 되지 않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기들의 그 연약함이 아기들로서는 가장 큰 협상력의 원천이 되는 셈이다.
 
달리 말하자. 아기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울고 투정부리는 것은 일종의 벼랑 끝 전술이다. 줄 때까지 울어 제끼니까. 이 벼랑 끝 전술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벼랑 끝에 발생할 결과를 두려워하는, 그런 일이 발생해서는 안된다고 믿는 상대방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 아기들의 벼랑 끝 전술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아기들의 울음을 애처롭게 여기는, 혹시 울다 탈이 날까 두려워하는 부모가 있어야 한다. 행인지 불행인지 세상의 모든 부모는 그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니 아기들은 항상 이긴다.
 
국가 간의 협상에서는 어떨까? 역시 마찬가지다. 상대방의 벼랑 끝 전술이 가져올 결과를 두려워하는 협상의 또 다른 상대방이 있다면 상대방의 벼랑 끝 전술은 효력을 발휘한다. 협상의 또 다른 상대방은 그런 일이 생겨서는 안된다고 내심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북한이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를 상대로 벼랑 끝 전술을 사용해서 성공한 것은 북한이 바로 이런 구조를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벼랑 끝 전술에 상대방이 바로 벼랑 끝 전술로 대응해오면 애초의 벼랑 끝 전술은 성공하지 못한다. 북한이 부시 행정부에 전전긍긍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제 2 의 사춘기에 접어든 고등학생들은 어떨까? 야단을 치지 말라고, 간섭하지 말라고, 내가 뭘 잘 못했냐고,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을 일삼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아이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달래야 한다.'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달랜다고 들을까? 아이들은 부모가 야단치는 그 행위에 대해서 반기를 들지만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버린다.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뭐. 그런 거다. 어떻게 해야 하나?
 
'아주 강력하게 나무래야 한다.' 그렇게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반기를 든 상태에서 또 나무라면 어떤 반작용이 일어날까? 아이들은 아무 대책 없이, 자신의 앞 일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면서, 집을 나가버린다. 벼랑 끝 전술이다.

자신의 인생과 앞 일에 대한 고려보다는 야단치고 잔소리하는 부모가 그냥 못 견디게 싫은 거다. 기분 같아서는 독하게 마음먹고 장딴지 만한 회초리 하나 준비해서, 동서양의 금언과 사례를 인용하여 설득하고 싶지만, 아이들에게는 쇠귀에 경 읽기다. ‘웃기지 마라’다.


부모들은 이 지경이 되면 아이를 나무라지 못한다. 아이들의 벼랑 끝 전술이 가져올 결과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런 구조 하에서는 제 2 의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에게 부모는 자기들 밥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밖에 방법이 없다. 포기하는 것이다. 속이 문드러져도 망발을 일삼더라도 그저 못 본 척 도를 닦듯 넘어가는 것이다. 불가능하다고?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세상을 좀 살았고 사람살이의 인과관계를 조금 아는 부모가 제 살 도려내듯 포기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그래서 어느 날, 문득 지들이 부모가 되어 제 자식들이 자기들에게 덤벼들 때 그제서야 지들의 사춘기 시절 부모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들을 견뎠는지 이해할 것이다.

아! 아니라고 한다. 문드러지도록 참지 말고 지들이 벼랑 끝 전술을 쓰면 부모도 동시에 벼랑 끝 전술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위험을 무릅써야 아이들이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집을 나가서, 이 세상 어디에 지들의 투정을 받아 줄 데가 있는지, 이 세상 어디에 자신들의 철없는 짓을 용납하는데가 있는지 가슴 시리도록 확인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정말 그렇게 모질게 몰아 붙일 수 있을까? 가정의 달이라는 이 찬란한 5월에 내 지인은 새삼 이 협상 아닌 협상에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었다. 아하, 이 세상살이의 괴로움이여. (협상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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