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가 부추기는 투기세력 '헌트 형제'?

머니투데이 유일한 기자 2008.05.22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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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가 부추기는 투기세력 '헌트 형제'?


텍사스 석유재벌의 막대한 유산을 받은 벙커(Bunker)ㆍ허버트(Herbert) 헌트 형제가 은 투기를 시작한 것은 1974년. 이때 시세는 온스당 3.27달러였다. 헌트 형제의 유동성 동원력은 상상을 초월했고, 이들이 선물과 현물시장에서 동시에 매집에 나서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며 1980년 1월 은은 50.06달러까지 뛰었다.

그로부터 28년이 넘게 지난 21일(현지시간) 뉴욕상업거래소에서 은 7월물 가격은 18.05달러를 기록했다. 당시 얼마나 심한 버블이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형제가 매입한 은의 규모는 약 100억달러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막대한 차익을 눈앞에 뒀으나 계획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채산성 악화로 폐쇄됐던 광산이 재가동되고 장롱 속 은이 쏟아지며 공급이 넘쳤기 때문이다. 정부도 규제에 나섰다.



평정심을 잃은 헌트 형제는 은행 돈을 빌려 시세를 떠받쳤다. 두달간 미국 전체 대출금의 10%를 빌리는 황당한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추세를 바꿀 수는 없었다. 3월 초 가격은 40달러 이하로 내려갔다.

형제가 은행 대출을 갚지 못할 것이라는 소문에 3월27일 은은 10.8달러까지 떨어졌다. 금융시장이 요동칠 정도로 충격이 왔다. 투기는 이렇게 버블 붕괴와 함께 막을 내렸다.

다시 2008년 5월21일, 원유선물 가격이 배럴당 133달러를 넘어섰다. 연 나흘째 최고가다. 2016년에 인도되는 장기선물 가격은 142달러를 넘어섰다. 장기적인 선물 가격이 급등한다는 것은 장기적인 상승을 예상하는 투자자들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산유국과 정유사 등 일부를 제외하면 유가 급등을 바라는 사람은 별로 없다. 유가가 오르면 경제가 둔화되고 민심이 흉흉해진다. 정치인들도 이를 반길리 없다.
미상하 양원은 이번주 들어 청문회를 열고 급기야 기관투자가로 대표되는 투기세력이 원유시장의 랠리를 주도하고 있다며 비난하고 있다. 관련 규제책도 곧 나올 모양이다.

헌트 형제의 은 투기 당시와 돌아가는 정황이 비슷하다. 그렇다면 원유시장도 일정한 시점에서 버블이 붕괴되고 결국 투기세력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까.

일단 차익을 노린 투기세력이 유가상승에 일조한 것은 근거가 있어 보인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21일자 '짧은 논평'(숏뷰)에서 상품 선물 인덱스 투자가 5년전 130억달러에서 현재 2600억달러로 급증했다고 투자가인 마이클 마스터스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대대로 원유 선물시장은 매도 중심의 시장이다. 생산자들이 미래의 가격 하락을 헤지하기 위해 선물을 매수하는 경향을 보였고, 투자자들은 이에 맞춰 매수보다는 매도에 치중해왔다. 1990년에는 원유선물시장 미결제 계약 잔고의 13% 정도만이 매수포지션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비중은 58%로 급증했다. 인덱스 투자자들의 역할이 큰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해 초 GSCI(골드만삭스 원자재 가격지수)에서 에너지 비중이 줄어들자 유가는 배럴당 50달러를 이탈하기도 했다. 인덱스 투자자들이 원유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공급 부족이 있을 것이라는 우려와 달리 실제 미국 시장에서 공급 부족 현상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FRB는 최근 미국의 상품 재고가 크게 늘지 않는다고 진단했다. 이는 투기세력의 베팅을 강화하기도 했다.

이것만 보면 투기세력을 유가 급등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매도할 수 있다.

문제는 투자자들의 선물 수요가 증가하는 것에 맞춰 중국의 원유 소비 수요도 급증했다는 점이다. 투기세력만을 탓할 수 없는 중대한 이유가 되고 있다. 가뜩이나 미국 중앙은행(FRB)의 공격적인 금리인하에 따라 약달러세가 이어졌고 당연히 유가는 이에 자극받았다. 산유국들은 달러화가 하락하는 것에 상응하는 원유가격 상승은 '당연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FT는 "투기가 원유를 비롯한 상품시장의 작동에 의미있는 변화를 주고 있다. 논쟁이 필요하고 규제 변화도 바람직하다"면서 "그러나 지금의 유가 상승이 투기세력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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