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주총르포]주식반토막,CEO는 떼돈?

뉴욕=김준형 특파원 2008.04.25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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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릴린치 주총현장①-허술한 위험관리·막대한 임원 보수 성토

편집자주 월가 금융회사의 주총장분위기가 사뭇 험악해졌다. 지난해 서브프라임발 부실로 막대한 손실을 입고, 주가가 급락하면서 주주들의 성난 목소리가 주총장에 메아리쳤다. 신용경색 회오리의 중심에 서 있는 월가의 대표기업 메릴린치의 주총장을 찾아 월가의 현주소를 살펴봤다.

24일(현지시간) 뉴욕 맨해튼 남단 월드 파이낸셜 센터에 자리잡은 메릴린치 본사.
기업들의 업무가 시작되기 한참전인 오전 7시부터 서류가방을 든 정장 차림의 남녀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인근 뉴저지주의 메릴린치 캠퍼스에서 열리던 예년과 달리 올해 주총은 맨해튼 본사에서 처음으로 열렸다. 주주들이 좀 더 쉽게 주총장을 찾을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안내요원들의 친절한 미소와 깔끔한 다과, 잘 정돈된 주총장 등 주주들을 최대한 배려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찾은 주주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아 보였다.



주총시작 시간인 8시가 되자 500석의 자리가 거의 꽉 들어찼다. 200여명 선에 그쳤던 예년에 비하면 크게 늘어난 것이라는 메릴린치 본사 관계자의 설명이다.

지난해말 취임한 존 테인 회장의 사회로 주총이 시작됐다.
첫번째 안건은 테인 회장을 포함한 임원 4명의 이사 선임 승인 건.



◇ 스탠리 오닐 전회장 1.6억불 퇴직금 집중포화

↑주총이 열린 메릴린치 본사건물[뉴욕=김준형 특파원]↑주총이 열린 메릴린치 본사건물[뉴욕=김준형 특파원]


안건을 상정하자마자 의사진행 발언 요청이 들어왔다. 소액주주운동가로 유명한 에블린 데이비드 여사가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여든이 넘은 나이가 믿기지 않게 날카로운 목소리로 "막대한 부실을 초래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같은 사업분야에서 완전히 손을 뗄 것인가"라고 추궁했다.
테인회장이 "안건인 임원선임과 관련된 발언만 해달라"며 가볍게 경고했다.


하지만 에블린은 "임원 선임에 동의할 것인지를 판단하는데 필요한 질문"이라며 물러서지 않고 5분여에 걸쳐 기업지배구조 개선의 필요성을 역설해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에블린은 독립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이사 선임을 위해 집중투표제를 채택할 것을 주주제안 안건으로 올렸다.

안건이 상정될때마다 주주들의 불만에 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특히 지난해 주가가 반토막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스탠리 오닐 전 회장이 퇴직시 1억6100만달러를 챙겨가는 등 기업실적과 무관하게 경영진이 거액의 보수를 받고 있는 현실에 비판이 집중됐다.



◇ "보상은 '성공'에만 주어져야"..제도보완 제안 잇따라

기관투자자인 코네티컷 퇴직연금 펀드(CRPTF) 관계자는 발언기회를 얻자 "보상은 '실패(failure)''에 대해서가 아니라 '실적(performance)'에 대해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CRPTF를 포함한 3개 기관투자자들은 임원들의 보수를 결정하는 '보상 자문위원회'를 두고 주주들의 투표를 통해 위원을 결정할 것을 제안한다고 밝혔다.

미국내 최대 노동조합 조직인 산별노조 총연맹(AFL-CIO)의 연금펀드 운용책임자 역시 임원선임시 스톡옵션·세금대납 등의 특혜를 제한하는 '고용윤리 조항'을 도입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기관투자가인 'AFSCME 연금펀드'는 자사주 매입기간중에는 임원들의 주식매각이나 스톡옵션 행사를 금지하도록 하는 정관규정안을 주주제안으로 내놓았다. 이 펀드 대표는 "2006년 2월 이후 메릴린치가 90억달러를 들여 1억1660만주의 자사주를 사들이는 동안 오닐 당시 회장은 자기 주식 49만2262주를 팔아치웠다"고 비난했다.

↑존 테인 메릴린치 회장(뒷쪽 가운데)이 주주총회 직전 주주들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뉴욕=김준형 특파원]↑존 테인 메릴린치 회장(뒷쪽 가운데)이 주주총회 직전 주주들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뉴욕=김준형 특파원]
◇ "닥칠때까지 몰랐다니..." vs "우리만 그런게 아니라..."

회계법인 들로이트 투시를 외부감사인으로 선임하기 위한 안건 상정에서도 주주들의 불만은 터져나왔다.
한 주주는 메릴린치의 앤 리스 감사를 불러 일으켜 세운뒤 "이렇게 엄청난 충격이 닥칠때까지 전혀 알지 못했다는게 말이 되느냐"고 질타했다. 이에 대해 리스 감사는 "AAA등급 채권들이 부실화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인정한뒤 "문제가 발생한 뒤에는 적절한 위험관리 조치를 취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자세를 낮췄다.



테인 회장도 "과거 기술주 버블이나 롱텀캐피탈 파산 같은 경우에도 문제가 불거지기 전에 이를 알아차리지는 못했다"며 거들었다. 그는 "비록 내가 오기 전의 일이지만, 메릴린치 만의 문제가 아니라 월가 전체의 문제라는 점을 양해해 달라"고 부탁했다.

↑대형 스크린을 통해 중계되고 있는 가운데 존 테인 메릴린치 회장이 주주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뉴욕=김준형 특파원]↑대형 스크린을 통해 중계되고 있는 가운데 존 테인 메릴린치 회장이 주주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뉴욕=김준형 특파원]
◇ 능숙한 선장, 존 테인...소액·기관투자가 표결 역부족

테인 회장으로서는 뉴욕증권거래소에서 메릴린치로 옮긴후 처음 맞는 주총이지만
세계 최대 증권사 수장답게 당황하거나 물러서지 않고 의장으로서 주총을 이어갔다.
발언을 제지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끝까지 발언을 들은 그는 "나는 메릴린치의 브랜드, 문화, 비즈니스 파워를 믿기 때문에 이자리에 왔다"며 "메릴린치의 핵심 업무영역은 여전히 굳건하다"고 말했다. 그는 여전히 흑자를 내고 있는 각 사업부문의 실적을 일일히 열거하며 주주들의 성난 분위기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또 이달들어 95억달러에 달하는 자금을 조달, 820억달러의 현금을 보유하게 됐다며 주주들을 안심시켰다. 또 인건비를 10% 절감하는 등 강력한 구조조정을 통해 주주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여전히 주택가격은 하락하고, 에너지 곡물가격은 치솟으며 실업률이 올라가는 등 경제상황은 좋지 않지만 올해 나머지 시기에 대해서는 조심스런 낙관(cautiously optimistic)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1시간 가까이 경영진에 대한 성토가 이어진 뒤 더 이상 발언자가 없자 테인 회장은 표결을 진행시켰다. 대부분 사전에 위임장을 제출한 터라 현장에서 투표를 한 주주들은 별로 많지 않았다.



결과는 회사측의 압승.

집중투표제, 임원 자사주 매각제한, 보상 자문위원회 도입, 고용윤리조항 도입 등 주주제안 의안은 위임장 표결에서 일찌감치 기각됐다. 소액주주와 기관투자자들이 얻은 지지는 투표참가자의 29%에 그쳤다고 테인 회장은 밝혔다.
지분 9.02%를 보유한 최대주주 싱가포르의 테마섹을 비롯, 경영진이 확보한 경우호지분을 넘어서기에는 애초부터 소액·기관투자가들로서는 역부족이었다.

소액주주들 역시 보상체계와 거액손실에 대한 비판을 쏟아내면서도 '해결사'로 영입된 테인회장에게는 "우리는 당신이 필요하다" "당신의 능력에 신뢰를 보낸다"는 기대를 덧붙였다.
1시간10분여의 주총이 끝난뒤, 이전의 실수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달한 걸로 아쉬움을 달래며 주주들은 주총장에서 발길을 돌렸다.



↑주주총회를 마치고 메릴린치 본사건물을 나서고 있는 주주들[뉴욕=김준형 특파원]↑주주총회를 마치고 메릴린치 본사건물을 나서고 있는 주주들[뉴욕=김준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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