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허로운 생각을 떨치려고 마당 잔디에 잡초를 꼼꼼히 뽑는다. 지난주 마당 구석자리에 꽃나무를 심으려다 가운데 손가락 굵기만 한 더덕 20여 뿌리를 캐는 횡재를 했다. 집사람과 나는 논의 끝에 반은 맛보고 나머지는 다시 심어 불리기로 했다.
비즈니스로 참 많은 거래처를 만나고 때로는 사람에 치여 마음의 상처를 받고 은퇴할 날을 손꼽지만 멋진 순간들도 못지않게 많다. 만난기간은 짧지만 오랜 친구 같은 거래처로부터 반가운 연락이 왔다. 4월의 제철 음식 주꾸미를 먹으로 가잔다.
그 술이 와인으로 결정되면 그날 음식과의 매칭, 지역, 가격 등을 참작하여 마실 와인을 고른다. 하지만 무엇보다 상대방의 기호를 고려해야 한다. 오늘의 메뉴는 양념 주꾸미 석쇠구이 그리고 평소 소주를 즐겨하는 분들을 위하여 이강주를 선택했다.
육당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에 의하면 평양의 감홍로, 정읍의 죽력고와 더불어 전주의 이강고를 조선의 3대 명주로 꼽았다. 이강고를 계승한 이강주는 배 즙에 계피, 생강과 한약재로 쓰이는 울금을 넣어 만든다. 배의 청량감과 생강의 톡 쏘는 향, 계피 향이 어우러지는 문화재급 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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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주꾸미 샤브샤브를 내놓는다. 타원형 머리(?)부분을 지긋이 깨물면 잘 삶아진 계란 같이 말랑말랑한 껍질이 부서지고 가득찬 알들이 더욱 부드럽게 와 닿는다. 한알 한알 씹히며 터지는 느낌이 알마다 다른 맛을 느끼게 한다. 먹물이 들어가 검어진 국물을 한 모금 떠먹으면 짭조름한 바다의 내음이 풍겨진다.
매화꽃이 피고 튜울립의 구근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려고 고개를 내밀 때쯤이면 나는 삼동 겨울을 무사히 잘 보내고도 항상 이 봄이 오는 고개에 주저앉고 만다. 해마다 오는 나의 봄 몸살은 이번 주말경이면 끝날 것이다.
난리통에 태어나 그러잖아도 어려운 보리고개를 넘느라 내 DNA가 이 시기엔 가만히 주저앉아 봄꽃과 나무들이 땅을 뚫기 위해 몸부림치는 소리를 들으며 기다리도록 변형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어제 저녁 나는 아내에게 얼큰한 대구지방에서 먹는 소고기국을 부탁했다. 아들이 부대껴하면 어머니께서는 이 국을 끓이시곤 했다. 얼큰하면서도 말린 토란줄기의 단맛과 듬뿍 넣은 무우의 시원함으로 내 몸은 가뜬해 진다.
식탐을 해 여러 마리째 주꾸미 샤브샤브를 먹던 날, 문득 텁텁함을 해소할 산뜻한 쇼비뇽 블랑 한 잔이 생각났지만 밤늦게 집으로 오던 도중 나는 다시 생각을 바꾸었다. 이 잔인한 봄철의 액땜으로는 역시 이 땅의 제철음식과 술이 아니면 어려울 것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