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은 은행인들에게 '혹독한 세월'이었다. 은행의 예적금이 증시 활황으로 펀드와 주식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많은 은행인들이 발만 동동 굴러야 했다.
하지만 '위기'가 곧 '기회'가 됐다. 은행 예적금 상품으로 대표적인 히트를 친 '와인정기예금'을 개발한 정현호(47) 국민은행 개인상품부 팀장은 "냉혹한 환경이 야기시킨 경쟁의 바람이 반짝이는 아이디어 상품의 등장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심심한' 은행 상품에 '감성 코드' 도입
시중은행의 정기예금상품으론 꽤 높은 최고 연 5.8%의 금리를 꼽기 쉽지만 정 팀장은 "높은 금리는 결코 답이 아니다"고 고개를 젓는다. "조금 높은 금리를 준다는 건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보단 고객과 '윈윈'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죠. 그래서 금리가 아닌 '감성'을 키워드로 삼았습니다. 노년이라는 고정관념의 퇴색한 빛깔이 아닌 '트렌디'한 감성으로 다가가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한 트렌디의 구현 과정은 놀랍게도 '감성'이 아니라 '과학'적 기법으로 풀어냈다. 애용한 방법이 바로 설문조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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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화한 아이디어의 출발점은 결국 끊임없는 고객의 마음 읽기죠. 설문조사를 통해 고객의 생각을 5%만 읽어도 성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이디어 뱅크'도 알고보면 끊임없는 '시장 조사'가 낳은 결과물이라는 것. 와인정기예금의 '담배를 끊거나 규칙적인 운동을 실천하면 0.1%포인트의 우대금리를 준다'는 조항도 그러한 설문조사를 통해 끌어냈다.
"기획 초기에는 금연이나 운동조항이 공연한 반발을 일으키는 건 아닐까 은근히 걱정했어요. '난 원래 담배 안 피는데' 혹은 '담배 끊기 싫은데' 하면서요. 하지만 막상 조사를 해보니 반응이 상당히 긍정적이었어요. 은행이 우리의 건강까지 배려해준다며 고객들이 흔쾌히 받아들였어요. 거의 100%로요."
와인이란 상품명 역시 그러했다. 처음 생각한 단어는 빈티지였지만 '오래 묵어 깊이 있는' 느낌을 좀 더 살릴 수 있는 대상을 찾는 과정에서 '위스키', '와인' 순으로 관심이 옮겨갔다.
때마침 한 경제연구소에서 '와인세대'란 보고서를 내놓았고 '와인'이 유력 후보가 됐다. 시장조사 결과도 이와 맞아떨어졌다. '은행 상품에 웬 술?'하며 젊은층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지만 주 마케팅 대상인 중장년층은 급호감을 보인 것이다.
정 팀장이 자랑하는 아이디어의 원천은 또 있다. 바로 팀원들과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대화법이다. "사무실이 비좁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팀에만 굳이 테이블을 들여놓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죠. 업무가 진행이 잘 안될 때면 서로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이디어를 찾습니다."
그 테이블앞 벽에 붙여져 있는 큼지막한 세계지도도 눈길을 끈다. "좁은 공간에서나마 상상의 나래를 넓게 펼치자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젊은 시절 '로커'가 꿈이었다는 정 팀장. 그는 요즘 야심차게 공익상품을 새롭게 준비하고 있다. 그는 "은행이 주력상품을 통해 지속적인 기부를 할 수 있도록 효과적인 공익상품을 내놓을 예정"이라면서 "은행 상품의 구색맞추기식 고정관념을 깰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