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급의 역설

성상현 동국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2008.02.09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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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위크 칼럼]

어느 마을에 나이 지긋한 신사가 이사 왔다. 그의 서재 밖 공터는 아이들이 모여서 노는 곳이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조잘대며 노는 소리를 듣는 것이 즐거웠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아이들의 소리가 시끄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는 아이들이 모여 노는 것을 그만 두게 하고 싶었다.

곰곰이 생각한 끝에 그는 아이들에게 돈을 주기로 했다. 같이 놀 아이들을 더 데려와서 신나게 놀 때마다 얼마씩 돈을 주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100원, 그 다음에는 200원, 300원하는 식으로 액수를 늘려가며 돈을 줬다. 놀기도 하고 돈도 받고 하니 꿩 먹고 알 먹고 일석이조가 아닌가. 공터는 그야말로 북적대는 놀이터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사는 아이들에게 다가와서 “이제 나는 돈이 떨어졌다. 이제 너희들에게 돈을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러자 아이들이 불만을 터트렸다. “아니 그것은 약속 위반 아닌가요. 이제 무슨 재미로 놀지요?” 돈을 못 받게 된 아이들은 더 이상 같이 놀 아이들을 데려오지 않게 되었고 놀이도 더 이상 예전만큼 재미가 없어졌다. 아이들은 시무룩해졌고 놀이터를 떠나갔다. 공터는 조용해졌고, 신사는 한적한 분위기에서 다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심리학에서 인용하는 내적 동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유조선 기름 유출로 오염된 태안반도의 해변을 청소하기 위해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런데 일당 얼마에 기름 청소할 사람을 모집했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와서 자발적으로 일 할 수 있었을까 싶다. 어떤 조사에 따르면 자원봉사자에게 일한 대가를 지급하면 오히려 일할 의욕을 떨어뜨리게 되고 결국 자원봉사자가 줄어들게 된다고 한다.

대가없이 마음에서 우러나서 하던 일이 돈을 받기 시작하면 종국에는 대가를 바라고 하는 일이 돼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더 이상 봉사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고 ‘노동’이 된다.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노는 대가로 돈을 받기 시작하면 ‘놀이’는 돈을 바라고 하는 ‘일’이 돼버리는 것이다. 신사가 일한 대가를 안 주니 아이들도 더 이상 일할 이유가 없어진다. 놀이를 일로 바꾸는 것이 신사의 교묘한 책략이었다.



부모들은 무심결에 아이들에게 시험을 잘 보면 용돈을 올려 주겠다, 선물을 사주겠다는 등 대가를 제시한다. 아이들은 용돈과 선물을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 그런데 시험은 한 번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음 번 시험에는 또 무슨 선물이 있을까 기대하게 된다. 이게 습관이 되면 선물을 받기 위해 공부하는지 스스로의 꿈을 위해 공부하는지 혼선이 온다. 공부가 대가를 받으려는 ‘교환행위’가 되면 공부에 대한 자발적인 열정이 사라진다. 자발적 열정이 식은 공부는 좋은 결과를 내기 어렵다. 자발성 없는 봉사에는 사랑과 정성이 깃들지 않는 것처럼.

얼마 전부터 기업들은 성과급을 통해 열심히 일하게 하는 것이 선진적인 방식이고 ‘성과주의 인사’라며 앞다퉈 성과급제를 도입하고 있다. 성과에 따라 보상하는 것은 맞는 일이다. 그런데 들여다보면 무엇이 성과인지 평가기준은 무엇인지 불분명하고 구성원의 합의와 납득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더 큰 문제는 일하는 사람의 마음과 열정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관리자의 사고방식이다.

조직에 장기간 도움이 되는 성과를 내는 것은 단기간의 게임이 아니다. 지속가능한 성과, 탁월한 성과, 요즘 꼭 필요한 창의적인 성과는 일의 결과와 급여를 교환하는 무미건조한 성과급제만으로는 실현되기 어렵다. 구성원의 마음을 얻고 진정한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비전과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존에 가졌던 열정마저 성과급이라는 이름의 얄팍한 돈봉투 속에서 사라져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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