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건설 매각과 김석준의 그림자②

더벨 박준식 기자 2008.01.14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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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스토리]채권단, 공적자금회수 위해 김 회장 퇴진만류

이 기사는 01월14일(10:50) 머니투데이가 만든 프로페셔널 정보 서비스 'thebell'에 출고된 기사입니다.


김석준 회장이 워크아웃 이후에도 쌍용건설 경영을 맡게 된 것은 채권단의 요청 때문이다.



쌍용건설 (0원 %)은 82년 김 회장이 그룹 내에서 처음으로 이사직에 올라 경영을 시작한 계열사. 이듬해 사장이 된 그는 만 12년을 임직원들과 동고동락했다.

그러던 그가 잠시 외도에 나선 때는 94년, 쌍용자동차 대표가 되면서부터다. 88년 동아자동차를 인수해 완성차 제조업을 핵심사업으로 선택한 쌍용그룹은 김 회장이 취임한 94년 창원공장을 준공, 독자 엔진생산을 선언했다. 벤츠로부터 배운 엔진제조기술이 독자생산을 가능케 할 정도로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쌍용건설 매각과 김석준의 그림자②


2년 후인 96년, 김 회장은 건설과 자동차에서 쌓은 경영능력을 발판삼아 그룹 회장직에 오른다. 그는 15대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한 형 대신 그룹경영을 총괄하게 된다.

하지만 건설업계 관계자들은 쌍용그룹이 자동차 산업에 주력하면서 쌍용건설의 경쟁력이 급속히 떨어졌다고 평가한다.

우선 80년대 저유가, 저금리, 저달러 등 3저 호황으로 치솟았던 건설경기가 90년대 들어 위축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해외사업이 점점 줄면서 건설사들의 국내사업도 본격적인 경쟁국면에 돌입했다.


회사 관계자들은 오너가 떠난 자리에 앉은 전문경영인의 입지가 그 같은 위기를 극복할 정도로 확실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김석준 회장이 재직할 때 업계 최고수준이던 임직원 대우는 낮아지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그룹 내에서 건설사 직원들이 갖는 위상도 체감할 정도로 위축됐다.

사실을 직시한 김석준 회장은 2년만인 98년, 그룹 회장직을 내놓고 쌍용건설로 복귀했다. 하지만 회사의 경영상태는 4년 만에 암담한 수준으로 변해 있었다. 회사는 그가 복귀한 지 1년도 안돼 워크아웃에 돌입했다. 그건 김 회장이라도 어찌해 볼 여지가 없었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실제로 채권단은 이 같은 이유로 김 회장에게 경영부실의 직접적인 책임을 묻지 않았다. 외연상 책임은 오너 일가에 있었지만 김 회장을 경영진에서 배제할 경우 회사를 청산해야 할 상황이었다. 자산관리공사 등 채권단은 공적자금 회수극대화를 위해 오너의 경영 및 도덕적 책임은 사법기관에 맡기고 대신 김 회장의 경영일선 후퇴는 만류하기로 결정했다.

부도 위기에 처한 쌍용건설을 살릴 수 있는 적임자는 회사에 애정이 있는 창업주나 마찬가지인 옛 오너 밖에 없다고 인정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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