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의 보호는 자발적인 교환과정에서 가격이라는 신호가 개인의 의사결정을 제약하는 조건이 되어 희소성을 반영한 자원배분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경제학의 기본을 무시하는 밀어낼 수 있는 거창한 명분이 되어 버렸다. 고속철도, 터널, 대단위 방조제의 건설이 장기간 저지된 황당함은 자연 그 자체에 목적이 있다는 인식체계를 극복하지 못한 사람들의 실력 때문이었으리라.
1회용품을 고객들에게 그냥 주지 못하게 하면 고체 쓰레기는 줄어들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저금통으로 퇴장될 동전 하나로 조악한 면도기 하나 살 수 있다면 억제효과는 크지 않을 것이며 1회용품 규제로 고급 제품을 사 써야 한다면 필요도 없는 것을 사고 버려야 하니 그 자체가 낭비이다.
내가 하면 개혁 남이 하면 규제라던가. 역대 계속 불필요한 규제를 철폐할 것이라고 주장해 왔지만 그럴 듯한 명분을 들먹인 규제는 늘어났다. 환경 정책은 그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현대의 양돈산업이 음식물쓰레기보다는 수입한 곡물로 만든 사료를 기반으로 하는 상황에서, 냄새 나는 음식물쓰레기통을 길거리에 방치하면서까지 수집하는 것은 무슨 효익이 있는가. 물리적으로 재활용할 수 있다지만 경제적 효용성이 없는 폐지와 플라스틱까지 분리 수거해서 그냥 한군데 갖다 버리면 분리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환경 담당 직원의 일거리를 위해서 그런 것인가 환경을 구실로 돈 버는 사람들의 복지를 위한 것인가.
사람들에게 절약과 환경보호의 중요성을 일깨우기 위한 상징적인 제도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할 지도 모르겠다. 예를 사람들이 집에서도 1회용품을 사용하지 않고 반드시 설거지를 해서 쓴다고 치자. 아직까지 우리 가정에서 여성이 가사 일을 한다면 이것은 여성, 특히 맞벌이를 해야 간신히 집세와 아이 교육비를 낼 수 있는 노동계급의 여자들에게 차별적으로 작용한다. 명절 증후군에 여자들이 시달린다고 입으로만 떠들지 말라. 1회용을 쓰면 상당 부분 저감된다. 또 재활용을 빌미로 쓰레기를 집안에 축적하게 하는 것은 무슨 낭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