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7대 대통령 당선자 이명박.
기업 최고경영자(CEO) 출신인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5년간 대한민국호(號)의 대항해를 이끌 대통령에 당선됐다. 오랜 기간 재계에 몸담았던 기업인이 국가 수반에 오른 것은 우리나라 정치사(史)상 처음 있는 일이다.
이 당선자의 '이력'은 전직 대통령들과는 사뭇 다르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이 군인 출신이라면 민주화를 이끈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직업정치인이었다. 참여정부를 탄생시킨 노무현 대통령은 인권 변호사 출신이다.
◇'굴껍데기'처럼 들러붙은 가난= 이 당선자는 지금으로부터 꼭 66년 전인 1941년 12월19일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곤궁한 목장 노동자였던 아버지 이충우씨(1981년 작고)와 어머니 채태원(1964년 작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 학창시절의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
생활전선에 뛰어든 것도 세상 물정 모르는 초등학생 시절이었다. 고향인 포항 재래시장에서 어머니를 도와 좌판을 열고 '꼬마 상인'으로 행세했다.
이 시각 인기 뉴스
김밥과 풀빵을 만들었고 아이스크림에 뻥튀기 장사를 했다. 과일, 생선도 팔았다. 상거래 기술을 남들보다 먼저 익힌 셈이지만 이 당선자는 "굴껍데기처럼 들러붙은 가난이 떨어질 줄 모르던 시기였다"며 당시를 회상하곤 한다.
가난으로 고교 진학이 언감생심이던 그 때, 이 당선자는 주변의 도움을 받아 동지상고(야간부)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공부를 했다.
고교 3년 내내 수석은 이 당선자의 몫이었다. 동지상고 재학시절 뻥튀기 장사를 하던 시절의 유명한 일화가 나온 것도 이 무렵이다.
여고 앞에서 뻥튀기 장사를 하는 것이 부끄러워 이 당선자는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장사를 했다. 이를 본 어머니가 "네가 구걸을 하는 것도, 남을 속이는 것도 아닌데 뭐가 부끄러우냐. 당당하게 살아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당선자는 지금도 "어머니의 소중한 가르침을 이제껏 잊지 않고 살아왔다"고 말하곤 한다.
◇대학합격, '첫 신화' 쓴 학창시절= 1959년 12월 고교 졸업 후에는 다시 '먹고 살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 일을 해야 했다. 가족들과 함께 둥지를 튼 곳도 고단한 삶으로 점철된 이태원 '판자촌'.
매일 새벽이면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일당 노동자 신분이었다. 그러다 엉뚱한 생각을 했다. "대학시험이라도 한 번 쳐보자"며 도전장을 던졌다.
교재가 없어 청계천 헌책방 주인이 준 책으로 공부했다고 한다.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느라 함께 생활하던 노동자들로부터 "불 좀 끄라"는 원성을 들을 정도였다.
'주경야독' 끝에 1961년 고려대학교 상과대학에 지원했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시골 촌뜨기 일당 노동자가 이뤄낸 첫 '작은 신화'였다.
▲'6.3 시위' 주동 혐의로 재판받는 모습.
이 당선자는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환경미화원 시절 어두컴컴한 새벽에 일을 하다보면 차에 치여 다치거나 부상을 입는 분들이 많았다. 다치면 그 가족들의 생계가 막막했다. 그래서 내 월급을 환경미화원 자제들에게 기부한 것이다".
이 당선자가 사회 의식에 눈을 뜬 것도 이 무렵이다. 상과대 학생회장을 맡아 '한일 국교정상화'를 반대하는 6.3 시위를 주도했다. 결국 대법원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형을 선고받는다.
이로 인해 서대문형무소에서 4개월을 복역했다. 운동권 학생이란 '주홍글씨'가 새겨져 취업이 제한되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운명적 만남' 정주영과의 조우= 이 당선자는 자신의 삶을 바꾼 '사건' 중 하나로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의 만남을 꼽는다. 그의 말을 빌자면, "정주영이 없었다면 이명박도 없었"다.
이 당선자는 대학 졸업 후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국가가 국영기업체 취업이나 해외 유학으로 꼬드겨 운동권 학생들의 '사상전환'을 꾀하던 시기였다.
취업이 제한됐던 이 당선자는 "한 젊은이가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고자 하는데, 국가가 그 길을 막는다면 국가는 젊은이에게 영원한 빚을 지는 것입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박 전 대통령에게 보냈다. 새파란 젊은이가 청와대와 담판을 시도한 셈이다.
▲1981년 현대그룹 사원 하계수련회에서 고(故) 정주영 전 명예회장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는 모습.
이 당선자는 지난 7월 한나라당 검증청문회에서는 "신입사원 연수회 당시 정 전 명예회장이 '술을 먹자, 낙후되면 물러서라'고 해 내일 당장 쓰러지더라도 최선을 다해 끝까지 버텼다"는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이후 이 당선자는 타고난 부지런함과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정 전 명예회장의 신임을 받아 초고속 승진을 거듭한다. 입사 2년 만에 대리, 29세 이사, 입사 12년만인 1977년 35세의 나이에 사장에 오르는 등 '샐러리맨 신화'를 써 나갔다.
태국 건설현장에서 성난 인부들로부터 금고를 지켰던 일, 밤새 불도저를 해체한 뒤 조립하며 구조를 익힌 일, 현대자동차를 지키기 위해 전두환 대통령 시절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에 맞섰던 일 등이 당시의 대표적 일화들이다.
싱가포르 리콴유 전 총리,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모하맛 전 총리, 중국 장쩌민 전 주석, 옛 소련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 등과 '연'을 튼 것도 이 무렵이다.
이 당선자는 마침내 46살에 회장이 된다. 현대건설, 현대엔지니어링, 인천제철 등 현대 계열사 10여곳의 최고경영자를 지냈다. 하지만 '명'이 있으면 '암'도 있는 법. 이 시기 자녀 교육 위장전입으로 이 당선자는 대선 기간 내내 경쟁 후보들의 '맹공'
을 받아야 했다. 실소유 의혹을 받았던 문제의 도곡동땅을 처남과 친형이 사고 판 것도 이 즈음이다.
◇'청계천' 신화로 '청와대 CEO'로= 이 당선자가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92년이다. 27년간의 현대그룹 생활을 끝내고 14대 총선에서 민자당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된다.
그 해 대선 출마를 선언한 정주영 회장과도 결별하게 된다. 1995년에는 서울시장 신한국당 후보 경선에 나섰다 정원식 전 국무총리에게 패하는 쓰라림을 맛봤다.
그러나 1996년 15대 총선에서 '정치1번지' 서울 종로에서 출마, 이종찬 새정치국민회의 후보와 노무현 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 사사건건 부딪쳐 온 청와대의 현재 주인과 새 주인의 첫 격돌이었다.
이 당선자는 그러나 같은 해 9월 비서관이었던 김유찬씨가 선거비용 초과 지출 사실을 폭로하면서 선거법 위반 혐의를 받게 된다. 결국 1998년 의원직을 사퇴해야 했다.
어느 때보다 치열했던 한나라당 경선에서 김유찬씨와 박근혜 전 대표측 법률특보를 지낸 정인봉씨가 '검증'의 도화선을 당긴 것도 바로 이 사건이었다.
1년여를 미국에서 머물던 이 당선자는 1999년 말 귀국, 당시로서는 생소하던 '사이버금융' 사업에 손을 댔다. 2000년 LKe뱅크, e뱅크증권중개 등을 설립했다. 대선전 내내 이 당선자를 괴롭힌 BBK 전 대표 김경준씨의 악연이 시작된 것도 이때쯤이다.
이후 이 당선자는 다시 사업을 접고 2002년 7월 민선 3기 서울시장에 당선되면서 화려하게 복귀한다. 기업 경영기법을 시정에 도입하는 새로운 시도를 선보인 이 당선자는 재임 기간 중에 청계천 복원사업, 서울시 대중교통체계 개편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2006년 7월 퇴임 후 곧바로 대선 출마를 선언 근 1년여를 지지율 1위로 '독주'한 끝에 과반이 넘는 득표로 제 17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됐다.
▲서울시장 재임 시절 청계천 공사 현장을 찾은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