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피고름 천지… 신음만 가득

태안=황국상 기자 2007.12.12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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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현장 르포]잔잔한 물결 아래 스며든 검은 기름, 어민 한숨 깊어져

↑ 충남 태안군 신두리 앞바다. 앞쪽 까만 띠 부분이 굴 양식장이다.<br>
이 곳은 이미 기름으로 초토화됐다.↑ 충남 태안군 신두리 앞바다. 앞쪽 까만 띠 부분이 굴 양식장이다.
이 곳은 이미 기름으로 초토화됐다.


썰물 때 간간히 하얀 속살을 내보였을 법한 모래사장은 온통 얼룩덜룩한 멍투성이가 됐다. 밀물이 되니 깊은 모래 속에서 바닷물이 아닌 인간의 실수로 빚은 재앙인 검붉은 기름이 스물스물 배어나온다.

부글거리는 거품과 함께 해일처럼 밀려오는 검은 기름띠가 삶의 터진을 덮친 지 엿새째인 12일. 최대 피해지역 중 한곳인 충남 태안군 원북면 신두리 주민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 해안으로 나갔다.



↑ 태안군 신두리 주민들이 해변으로 몰려온<br>
시커먼 기름을 닦아내고 있다(아래). 작업을<br>
나온 주민들은 대개 할머니·할아버지들이다<br>
(아래).↑ 태안군 신두리 주민들이 해변으로 몰려온
시커먼 기름을 닦아내고 있다(아래). 작업을
나온 주민들은 대개 할머니·할아버지들이다
(아래).
이들은 물이 빠진 새벽부터 물이 다시 차는 해질녘까지 쉴새 없이 기름을 닦아냈다. 모래 속 기름을 퍼내는 일은 엄두도 못낸다. 물이 빠진 가장자리에 까맣게 들러붙은 기름을 닦아내는 일조차도 언제 끝날 지 알 수 없다.

기름제거를 위해 동참한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의 온몸도 어느새 기름으로 뒤범벅이 돼 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태안반도 전역을 할퀸 기름띠 확산이 소강상태라는 소식이다.

기름띠는 사고 지점 북쪽 20km 지점에 있는 대산석유화학단지 인근에서 진출을 멈췄다. 조류를 타고 남쪽으로 50km나 내려가 안면도 인근을 위협했지만 이 역시 잠시 숨을 골랐다.

해양경찰청 방제대책본부는 "해안으로 불어들던 북서풍이 약해졌기 때문"이라며 내심 물량을 앞세운 방제작업의 효과를 내세우고 싶은 듯하다. 그러나 그들은 모른다. 태안 앞바다가 소리없는 몸부림으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것을.


◇잔잔한 너울, 주름진 바다는 운다=긴급 생태계 보존 작업에 나선 환경운동연합이 구한 배에 동승해 '검은 지옥'의 현장인 바다로 나갔다. 바다는 평온했다. 언제 4m가 넘는 파도가 쳤냐는 듯, 태안 앞바다는 잔잔한 물결만 일고 있었다.

그런데 처음엔 잘 못본 것인 줄만 알았다. 파도 물결에 자글자글한 '주름'이 잡혀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주름은 해안에서 벗어날 수록 더욱 많이 보였다.

"잘 못본 게 아니예요. 저게 바로 유처리제입니다. 기름 가라앉히려고 뿌려대는 유처리제가 바닷물에 잘 섞이지 않아서 저렇게 보이는 겁니다."

↑ 태안 앞바다에서 해경 헬기(위)와 <br>
방제선이 줄기차게 유처리제를 <br>
뿌려대고 있다.↑ 태안 앞바다에서 해경 헬기(위)와
방제선이 줄기차게 유처리제를
뿌려대고 있다.
너울거리는 바다가 온통 주름투성이, 마치 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까 봤던 해군·해경 함정 뿐 아니라 헬기 서너대가 오가며 넓게 뿌려댄다. 이렇게 뿌려대도 죽죽 갈라진 짐승 거죽처럼 시꺼먼 기름 덩어리들이 바다 곳곳에 떠다닌다.

"해안에 두꺼운 기름이 밀려오는 걸 막으려고 유처리제를 뿌리는 건데 지금 소용이 있느냐"며 "바다를 또 한 번 죽이느니 해안에 다 밀려오게 하고 손으로 떠내는 게 낫겠다"고 푸념했던 한 자원봉사자의 목소리가 귀에 어른거렸다.

한 봉사자는 "하루 종일 배 한 척을 방제작업에 동원하는 데 30~40만원의 기름값도 안되는 돈만 내려 하는 '허베이스피리트호' 보험사와 선주(船主)의 충돌로 방제작업이 진척되고 있지 않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 태안 원유유출 사고의 당사자인 삼성중공업의 <br>
대형해상크레인(위)과 홍콩 유조선 '허베이<br>
스피리트호'(아래).↑ 태안 원유유출 사고의 당사자인 삼성중공업의
대형해상크레인(위)과 홍콩 유조선 '허베이
스피리트호'(아래).
사고 유조선 '허베이스피리트호'와 대형 해상크레인을 실은 '삼성1호'가 부딪힌 사고 지점으로 가봤다.

삼성1호 주변에는 문제의 예인선들이 바짝 붙어 있었고, 허베이스피리트호 역시 충돌 지점에서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정비 작업에 한창이었다. 원망스러운 유조선은 해안의 아수라장과 별개인 듯한 잔잔한 바다 위에서 너무도 평온하게 떠 있었다.

◇기름 토해 내는 바다=천리포항 앞바다. 방파제 너머로 3000~4000톤급은 족히 돼 보이는 해군·해양경찰 경비정 여러 척이 하얀 물줄기를 뿌려대며 지나갔다. 바다 위에 떠있는 기름을 응고시켜 아래로 가라앉히는 유(油)처리제다.

환경위해성 평가업체 네오앤비즈의 성찬경 연구원은 "사고가 발생하고 3일 동안 태안 앞바다에 뿌려진 유처리제가 7만톤이 넘는다"고 말했다. 유출된 원유 총량의 7배에 맞먹는 양이다.

"저 유처리제 때문에 엄청난 원유가 바다 속에 가라앉아 서서히 녹게 돼요. 그 물질들이 다 어디로 가겠어요? 다시 여기 해안으로 몰려오는 겁니다."

◇"갈매기 한 마리만 데려다주세요"=천리포 부두앞 식당 주인 오은숙씨(47)는 "여기서 갈매기 본 적 있나요"라고 물었다. 그러고 보니 어시장 바로 앞이라 갈매기가 붐빌 법도 하련만, 한 마리도 눈에 띄지 않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오 씨는 "기름냄새가 천리포를 꽉 채우자마자 갈매기들이 여기를 버리고 도망갔다"고 말한다.

↑ 천리포항 부두. 만조 때 기름이 들이닥쳤을 때<br>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이 곳은 현재 갈매기<br>
한 마리 없는 죽은 동네가 됐다.<br>
↑ 천리포항 부두. 만조 때 기름이 들이닥쳤을 때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이 곳은 현재 갈매기
한 마리 없는 죽은 동네가 됐다.
갈매기도 살기 싫어 날아가버리는 곳, 하지만 날개 없어 날지 못하는 인간은 지금껏 그래왔듯이 이곳에 뿌리박고 살 수밖에 없다.

"손님 다 끊어졌어요. 가게도 문닫아야죠. 이제 누가 여기를 찾아오겠어요. 바깥 양반이 배를 몰았는데 이제 고기잡이도 몇년 간 못해요."

짐을 챙기는 기자의 등에 대고 오 씨가 말했다. "제발 갈매기 한 마리만 꼭 데려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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