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면칼럼]가장 재미없는 선거판

머니투데이 박종면 편집국장 2007.11.19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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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작곡가 라벨이 지은 '볼레로'라는 곡을 아시지요. 연주시간이 겨우 17분에 불과한 스페인풍의 단순한 선율이 무한 반복되는 무곡풍의 소품이지요. 작곡가는 "아무런 표현도, 기교도, 혁신도, 주제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어떤 곡보다 듣는 사람을 취하게 만들지요.

▲파리오케스트라의 지휘자 크리스토퍼 에센바흐▲파리오케스트라의 지휘자 크리스토퍼 에센바흐


 지난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크리스토프 에센바흐 지휘의 파리오케스트라 연주회 때 마지막 곡이 바로 라벨의 '볼레로'였습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파리오케스트라가 프랑스 대표 작곡가 라벨의 대표작품 '볼레로'를 연주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겠지요.
 
파르라니 깎은 머리와 검은색 옷 때문에 수도승을 연상케 하는 지휘자 에센바흐는 아주 조용히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평소 공연에선 보기 힘든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연주가 시작되자 지휘자는 작은 북의 리듬에 오케스트라를 맡겨버리곤 지휘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양손을 모두 내린 지휘자는 자신도 한 사람의 관객이 된 듯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듣고만 있었습니다.
 
침묵하던 에센바흐가 두 손을 들어 올려 다시 지휘를 시작한 것은 모든 악기가 울부짖듯이 연주에 가세한 마지막 2~3분이었습니다. 가슴이 얼얼하고 정신이 멍할 정도로 폭발적인 관현악단의 연주가 휘몰아치면서 끝을 맺자 객석은 그야말로 환호와 감동의 도가니로 변했습니다. 늘 엄숙하고 근엄하기만 해서 기립박수와 "브라보"에 인색한 우리 관객들도 이날만큼은 예외였습니다.
 
'침묵하는 지휘' '무지휘의 지휘'로 에센바흐는 세계 유명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최근 몇년새 한국을 방문한 베를린 필의 사이먼 래틀이나 빈 필의 발레리 게르기예프, 뉴욕 필의 로린 마젤, 빈 슈타츠오퍼의 오자와 세이지 등을 압도하고 말았습니다.
 
연주가 끝난 뒤 에센바흐는 작은 북 연주자를 직접 지휘대로 데리고 올라와 격려해 주었습니다. 한 사람의 연주자를 연단으로 올라오게 해 격려하고, 관객들의 환호와 감사를 연주자에게 돌리는 일 역시 보기 힘든 광경이었습니다.



☞ 라벨의 '볼레로'듣기


꼭 한달 앞으로 다가온 대통령선거가 에센바흐의 '볼레로' 연주처럼 감동적일 수는 없을까요. 연주시간의 대부분을 침묵했지만 관객들을 너무도 감동시킨 거장처럼 묵묵히 선거운동을 해도 유권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끌어내는 그런 후보는 없을까요.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에도 도취하거나 자만하지 않고 그 영광을 국민들에게 돌리는 그런 지도자는 없을까요.
 
지금 돌아가는 판을 보면 모두 난망입니다. 이번 대선은 감동이 없다는 점에서 역대 선거판 가운데 가장 재미없는 선거가 될 것 같습니다. 술자리에서조차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우선 후보들 면면이 그렇습니다. 여론조사에서 지지도 1, 2위를 달리는 오른쪽 진영의 후보 중 한 사람은 부패한 냄새가 너무 납니다. 또 한 사람은 그가 왜 뛰어들었는지부터 이해되지 않습니다. 중도 및 왼쪽으로 눈을 돌려봐도 그렇습니다. 리더로서의 카리스마도 없고 개혁적이지도 않습니다. 정책은 불투명하고, 구호는 모호합니다. 신선함조차 없습니다.
 
"이회창이 막판에 끼어들어 판세가 요동치고, BBK의 김경준이 돌아왔는데 이보다 재미있는 선거판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겠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회창과 김경준 변수가 뜰수록 선거판의 감동은 줄어들지요. 더욱이 이회창 변수가 중간에 흐지부지되고, 머리 좋은 검찰이 도곡동 땅 수사 때처럼 애매하게 결론을 내릴 경우 세속적 재미마저 사라질 것입니다.
 
정치는 현실이고, 차차선의 선택이라도 해야 한다고 하니 투표소엔 가야겠지요. 아직 한 달이 남아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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