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깐하던 버냉키, 시장에 길들여지다

머니투데이 유일한 기자 2007.11.01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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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깐하던 버냉키, 시장에 길들여지다


벤 버냉키 연준(FRB) 의장은 취임할 때부터 현실경제에 얼마나 빨리 적응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을 샀다. 20년 넘게 대학 교수 생활을 한 '선비'가 파란만장한 금융시장과 경기변화에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지 불안했던 것이다.

버냉키 의장은 올 여름 신용경색이 터진 초기 국면에서 인플레이션을 통제한다는 중앙은행의 역할을 원론적으로 반복하며 이같은 우려를 키웠다. 그러던 그가 9월에는 예상을 깨고 금리를 0.50%포인트나 전격 인하하는 공격성을 보였다. 기존의 이미지와 달랐다.



그는 한달 보름 후 또 금리를 내렸다. 명분을 중시하는 연준 수장의 태도를 볼 때 동결될 것이라는 일부의 관측은 빗나갔다. 주식시장은 버냉키가 움직일 때마다 환호하며 크게 오르고 있다. 버냉키를 의심하던 사람들은 찾아볼 수 없다. 12월에도 금리를 내릴 것이라는 전망이 적지않다.

월스트리트저널은 31일(현지시간) 버냉키 의장이 취임후 첫 위기를 겪으면서 적지않은 변화를 보였다며 그 과정을 자세하게 소개했다. 연준 전담기자로 불리는 그레그 입의 관찰과 분석이다.



신용경색이 사람들에게 깜짝 등장한 것은 6월 후반이었다. 6월23일 베어스턴스가 서브프라임 모기지와 연관돈 파생상품 투자로 손실을 입은 헤지펀드를 청산한다고 밝히며 '무언가 문제가 크다'는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챈 사람을 별로 없었다.

연준의 태도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6월28일 연준은 미국 경제성장이 적절하게 이뤄지고 있으며 인플레이션이 주된 관심사라는 입장을 밝혔다. 신용경색 조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경제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제한적이라는 입장이었다.

7월18일 버냉키 의장은 우량등급과 투기등급간 신용스프레드가 확대되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낮은 수준에 있다며 기존의 태도에서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7월말부터 상황이 심상치않게 변해갔다. 미국에서는 아직 큰 사고가 없었지만 유럽 대륙이 먼저 흔들렸다. 7월29일 독일 금융당국은 독일산업은행 자회사인 IKB를 청산한다고 전격 공개했다.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에 투자했다 막대한 손실을 입고 은행의 재무제표가 크게 악화됐기 때문이다. 산업은행은 긴급 자금을 대규모 수혈한 후 청산하는 절차를 밟는다고 했다.

8월3일 이때까지도 버냉키는 "금융시장에 어떤 심각한 문제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입장을 CNBC에 출연해 내보였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금융기관들이 ABCP를 비롯한 위험 자산의 차환발행에 어려움을 겪는 등 신용경색이 본격화됐다.



7일 연준은 금융시장의 높은 변동성, 냉각된 신용시장, 주택 가격 하락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장은 완만하게 이뤄지고 있으며 인플레이션이 여전히 주요 관심사라고 동어반복했다. 시장은 적지않게 실망했고, 주가는 조정 강도가 세졌다. 8일 씨티그룹의 루빈은 버냉키를 방문해 "많은 사람들이 연준이 금리를 내려야한다고 말하고 있다"고 전했다. 루빈은 그러나 연준이 비교적 잘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9일은 버냉키 의장에게 하나의 충격처럼 기억되고 있다. BNP파리바은행이 일부 펀드의 환매 요청을 수용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펀드의 자산가치가 어렵다는 이유였다. 펀드가 투자한 채권을 제 값에 매각해 환매에 응해야하는데 매각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유럽중앙은행(ECB)은 시중금리 안정을 위해 금융시장에 950억유로, 1310억달러를 퍼부었다. 엄청난 돈이었다.

버냉키는 유럽중앙은행이 예상보다 큰 자금 투입을 하자 바짝 긴장했다. 이날 다우지수는 387포인트 하락했고 단기금리는 연준의 목표치인 5.25%를 훌쩍 넘어섰다. 놀란 버냉키는 10일 드디어 시장의 요구에 순응한다는 태도를 보였다. 아침 일찍 공개시장위원회(FOMC)는 컨퍼런스콜을 열었고 신용위기에 대한 첫 공식 입장을 내놓았다. 즉 "금융시장이 정상적으로 기능하기 위해 충분한 유동성을 투입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한번 멍이든 시장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미국내 최대 모기지업체인 컨트리와이드 파이낸셜은 위기에 빠졌다. 모기지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투자자에게 모기지 증권을 매각했는데, 신용경색이 심해지면서 더이상 모기지를 사는 투자자들을 찾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뉴욕은행은 추가적인 담보를 요구했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컨트리와이드 자산을 매각할 것이라고 했다. 뉴욕 연방은행이 개입했고 16일 컨트리와이드는 115억달러의 신용라인을 개설하는데 성공했다.



돌아가는 정황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인정한 연준은 17일 지급준비율을 0.5%포인트 인하한다. 금리인하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비상회의를 열어 금리를 인하해야하는 선택은 하지 않았다. 연준은 "신용경색이 경기 성장을 위협하고 있다"는 지금까지와 다른 코멘트를 남겼다. 이날 다우지수는 233포인트나 올랐다.

8월22일 월가의 4개 시중은행이 재할인율 창구를 통해 20억달러를 조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금리인하 시그널이 처음 나온 것은 8월31일 잭슨홀 연설에서 였다. 버냉키는 이날 중앙은행의 역할이 투자자들의 잘못된 선택과 판단을 보호하는 게 아니다면서 "그러나 금융시장이 경제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연준은 이러한 점을 심각하게 고려해야한다"고 말했다. 9월7일에는 8월 고용이 4년만에 처음 줄어들었다는 노동부의 충격스런 발표가 있었다. 후에 증가한 것으로 수정됐지만 미국 경제는 일대 혼란에 휩쌓였다.



이기간 버냉키는 9월18일 금리인하를 단행할 때까지 금융시장의 시스템 위기에 대해 집중 토론하고 연구했다. 경기 동향을 관찰하는 가운데 중앙은행의 역할에 대해서도 깊게 고민했다.

금리인하 직전 앨런 그린스펀 전 연준 의장은 회고록 '격동의 시대-신세계에서의 모험'이 출간됐고 그린스펀은 전세계를 돌며 인플레이션 압력이 높아졌고 경기침체 위험도 커졌다는 숱한 말들을 쏟아냈다.

그리고 마침내 9월18일 FOMC 회의. 0.25%포인트와 0.50%포인트를 두고 논쟁이 있었지만 만장일치로 후자가 결정됐다. 다우지수는 336포인트 급등했고 13일 뒤 사상최고가를 경신했다.



버냉키는 10월31일 다시 금리를 인하하며 시장의 기대에 부응했다. 이제 전문가들과 투자자들의 불안감은 사라졌다. 버냉키 역시 '그린스펀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편안한 인식이 지배적이다. 시장의 요구를 충실하게 들어주는 버냉키 의장의 변신이 그렇다고 100% 무죄라고 보기는 어렵다. 일부는 고유가와 약달러를 부채질한다고 지적한다. 인플레 위험도 점차 커졌다고 항의하고 있다. 시장에 길들여진 연준 의장이라는 시선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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