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양균'을 위한 변명

머니투데이 박창욱 기자 2007.09.20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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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속의 성공학]38번째..영화 '데미지'

1. 최근 '신정아' 사건으로 인해 온 나라가 떠들썩합니다. 학력위조에서 출발한 사건이 언론 보도를 통해 일종의 '권력형 스캔들' 의혹으로까지 확대됐습니다.

검찰 수사가 진행되면서 신정아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최근 화제의 중심에 섰습니다. 수사를 통해 변 전 실장은 신정아씨에게 연애편지의 성격을 띤 이메일을 보낸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지요.



'변양균'을 위한 변명


이와 관련한 일련의 뉴스를 보면서 예전에 봤던 영화 '데미지'가 떠오르더군요.

제레미 아이언스가 연기한 영화 속 주인공 스테판은 의사로서 좋은 집안의 여인과 결혼했고, 정치인으로서도 성공가도를 달리던 50대 남성입니다.



그런 그가 어느 파티에서 만난 안나라는 여인과 불 같은 사랑에 빠집니다. 그러나 안나는 알고보니 스테판의 아들인 마틴의 애인이었습니다. 스테판은 죄책감을 느끼지만 '팜므파탈' 안나는 계속 스테판을 유혹하고, 스테판은 점점 헤어나질 못할 불륜의 늪 속으로 빠져들어갑니다.

안나는 아버지 스테판과의 밀회를 즐기면서도 그의 아들인 마틴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려 하지요. 결국 마틴에게 육체 관계의 현장을 들키게 되고, 마틴은 그 충격으로 계단에서 떨어져 실족사합니다. 스테판은 아들과 아내, 그리고 모든 것을 잃고야 맙니다.

영화속의 스테판이나 실존 인물인 변 전 실장은 왜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관계를 가졌던 걸까요? 물론 변 전 실장의 경우는 스캔들의 실제 및 그와 관련한 권한 남용 여부 등 아직 사건의 실체가 완전하게 밝혀지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부적절한 관계로 인해 자신의 지위가 한 순간 무너진 점에서는 영화의 상황과 매우 닮아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2. 최근 저녁식사 자리가 있었습니다. 기자를 제외한 나머지 참석자들은 모두 기자보다 윗 연배들이었습니다. 이 자리에서도 자연스레 '신정아 사건'이 화제가 올랐습니다.

60대 초반인 한 분은 신정아씨 문제로 낙마한 변 전 실장에 대해 "법적이나 사회·도덕적으로는 죄가 나타난다면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하겠지만, 인간적인 측면에선 동정이 가는 부분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 분의 이야기는 이랬습니다.

"변 전 실장은 학창시절 미술을 좋아했답니다. 하지만 그런 끼와 열정을 일단 접고 죽어라 고시 공부를 매달렸겠지요. 그렇게 해서 공직에 들어온 이후에도 30여년간 밤낮없이 죽어라 일만 했을 테고요. 그 덕분에 마침내 장관이라는 사회적 지위를 성취했지만, 젊고 예술적 감각까지 갖춘 신정아를 만나면서 자신이 접었던 꿈과 함께 마음속의 로맨스가 되살아나면서 흔들리게 된 걸 겁니다."

중·장년층인 참석자들은 그 이야기에 상당히 수긍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 분의 말씀은 이어졌습니다. "아무리 부나 권력을 손에 쥐어도 결국엔 허무함을 느끼게 돼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로맨스를 통해 맛보는 '남자로서 존재감'은 이성만으로는 좀처럼 제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이 이야기는 페미니스트 여성들이 들으면 도저히 동의할 수 없을 겁니다. '남성편의적 사고' 혹은 '비도덕적'라며 온갖 비난이 쏟아지겠지요. 하지만 앞서 전제한 것처럼 그야말로 '인간적인' 측면으로 생각해보죠. 남편과 자식 뒷바라지하다가 '내 인생은 뭔가'하고 허무함을 느끼면서 한편으론 로맨스를 꿈꾸는 중·장년층 주부들의 심리와도 비슷한 맥락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한편으론 이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보통 여성들은 자신의 노력외에도 결혼을 통해 신분상승을 향한 '제2의 기회'를 엿볼 수 있다고들 하지요. 이와 달리, 남성들은 인생의 모든 것을 자신의 힘으로만 해결해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생기게 되는 '미처 누리지 못한 낭만에 대해 갈구하는 마음'은 여성의 그것과는 어쩌면 조금 다른 성질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3. 어른들은 흔히 '사고를 쳐도 젊을 때 치라'고들 합니다. 잠시 흔들리더라도 망가졌던 부분을 복구할 시간적 여유가 있고, 기실 이룬 것이 없기에 잃을 것도 별로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젊었을 때엔 사랑을 해도 완전히 미쳐 열정적으로 해도 됩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가면서는 좀 더 '책임있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가정과 사회적 지위와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 등 소중한 것들이 많아지다 보니, 그저 내 감정만 앞세울 순 없는 노릇이지요. 아, 윤리 도덕 운운하는 공자님 말씀을 하자는 게 아닙니다. 스탕달은 "사랑의 감정은 열병과 같은 것이어서 자신의 의지나 나이와는 상관이 없다"고 했습니다. 불쑥 찾아오는 사랑의 감정이 과연 억지로 눌러질까요.

책임있는 사랑이란, 음…이를테면 영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 나오는 중년의 남녀 킨케이드와 프란체스카를 예로 들 수 있겠네요. 킨케이드는 유부녀인 프란체스카에게 무뚝뚝하면서도 진실한 사랑 고백을 합니다. "이런 종류의 확실한 감정은 평생 단 한번 오는거요.(This kind of certainty comes but once in a lifetime)' 하지만 그들은 함께 떠나는 모험을 하는 대신, 책임있는 이별을 했기에 더 아름다운 사랑을 평생 간직할 수 있었지요.

이와는 반대로 매우 극단적인 사랑의 전설도 있습니다. 중세 독일의 이야기입니다. 한 젊은 백작이 덴마크를 여행하다 길을 잃었습니다. 그러다 그는 우연히 아름다운 성을 발견했습니다. 성에는 두 아이와 함께 살고 있는 아름다운 미망인 오라뮨데 백작부인이 있었습니다.

둘은 곧 사랑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젊은 백작은 부모님의 반대가 두려웠습니다. 그는 오라뮨데 부인에게 '네개의 눈'이 사라지면 다시 올 것을 기약하고, 고향으로 일단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젊은 백작의 부모님은 의외로 흔쾌히 둘의 사이를 허락해주었습니다.

수 개월 후 젊은 백작은 다시 부인의 성으로 돌아왔습니다. 부인은 이전과는 분위기가 영 딴판이었습니다. 부인은 그에게 "이제 네 개의 눈이 없어졌으니 결혼할 수 있겠냐"고 묻습니다. 사연인즉, 부인은 네 개의 눈이 부인의 두 아이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 아이들을 죽여버린 것입니다. 이미 네개의 눈인 부모님에게 허락을 받았던 그는 그 사실을 알고 부인에게서 정신없이 도망쳐 버립니다.

사랑의 문제란 이처럼 오묘하면서도 정말로 어렵습니다. 뭐라 딱히 결론을 맺기가 참 힘드네요. TV프로그램에서 늘 나오는 식상한 방식의 멘트가 떠오릅니다. '언제 어디서 찾아올 지 모르는 중년의 사랑,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는 여러분들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

4. 영화 '데미지' 이야기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스테판은 모든 걸 잃은 이후, 기차역에서 우연히 안나를 보게 됩니다. 그녀는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해서 아이를 안고 있었습니다. 영화엔 스테판의 씁쓸한 독백이 흐르지요. "그녀는 다른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상 모든 것을 잃더라도 만나고 싶었던 그녀였지만, 헤어지고 보니 별 다를게 없는 여자였다 이겁니다. 그래서 시인 로맹 롤랑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자는 완벽하게 변화할 수 있다는 무서운 재능을 지녔다. 이런 재능은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들을 두렵게 만든다."

"Damaged people are dangerous. They know they can survive."(상처받은 사람들은 위험해요. 살아남는 방법을 알거든요) 영화속에서 안나가 스테판에게 한 말입니다. 물론 다른 사람의 취향을 일률적으로 재단하고 싶진 않습니다만, (영화속 안나도 그렇듯) 중년의 남자를 좋아하는 여성의 마음 속엔 같은 또래와 했던 사랑에서 상처를 받았던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아니면 정말로 순수하거나요.

이미 상처를 받아봤던 그들은 더 자극적이고 열정적이면서 모험적인 사랑을 추구하면서도, 그로 인한 상처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본능이 훨씬 더 발달해 있지요. 상대편 중년남자보다도 말입니다. 만약 젊은 시절 로맨스를 경험하지 못했던 중년 남자라면 감정의 처리에서 오히려 훨씬 더 미숙할지도 모릅니다.

이제 중년 남자들이 참고할 만한 명언 한 가지를 소개하면서 긴 장황설을 그만 마칠까 합니다. "복수와 사랑에서 여자는 보다 야만적이다." 니체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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