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면칼럼]신도들은 돌아왔지만..

머니투데이 박종면 편집국장 2007.09.03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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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 수준의 미술 투자자들에겐 상상조차 되지 않겠지만 해외 유명 작가의 작품 중에는 수백 억원이 넘는 것은 물론 1000억원대 작품도 적지 않습니다. 특히 피카소나 고흐의 작품 중에 고가인 게 많습니다. 현대 화가 가운데는 미국 팝아트의 대표주자 앤디 워홀의 작품이 엄청 비쌉니다. 수백 억원짜리 작품이 수두룩합니다.
 
미술품은 일반 상품과 달리 통일된 가격이 없고 그때그때 들쭉날쭉합니다만 비싼 작품들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것은 불우하고 암울한 삶을 살았던 작가일수록 가격이 비싸다는 것입니다.
 
물론 워홀처럼 예술작품에 대한 평가가 충분히 이루어진 1970년대 이후 한창 활동한 현대 작가들로 오면 상황은 달라지지만 경제적으로는 물론 정신적으로까지 그토록 처절한 삶을 살지 않았던들 고흐의 작품이 지금처럼 비싼 가격에 팔렸을지 의문입니다.
 
▲피카소가 청색시대에 그린 '파이프를 든 소년',<br>
소더비 경매에서 1억달러 이상에 팔렸다.▲피카소가 청색시대에 그린 '파이프를 든 소년',
소더비 경매에서 1억달러 이상에 팔렸다.


피카소도 그렇습니다. 말년의 피카소는 남부러울 게 없이 살았지만 스페인 태생으로 프랑스로 넘어와 정착하던 젊은 시절 피카소의 삶은 매우 힘들고 암울했습니다. 피카소의 작품들 가운데서도 '청색시대'로 불리는 젊은 시절 작품이 가장 비싼 현실은 역설적이기조차 합니다.
 
국내 화가들 가운데 가장 비싼 가격에 거래되는 박수근과 이중섭도 비슷합니다. 생계조차 꾸리기 힘들었던 그들의 암울한 삶이 없었던들 그들의 작품이 지금처럼 높은 평가를 받았을지 궁금합니다.
 
그들의 고통이, 그들의 암울한 삶이 예술가의 작품을 위대하게 만든다는 진실은 비단 미술작품에만 해당하지는 않습니다. 베토벤과 말러와 브람스도 그렇습니다.

대중가요에도 이런 원칙이 적용됩니다. 조영남의 지적처럼 배호와 김정호와 김현식의 노래가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것도 고흐나 고갱처럼 늘 죽음과 맞서기까지 한 그들의 비극적 삶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문득 삶이 덧없다는 생각이 들 때 술 한잔에 취해 김광석의 '서른즈음에'를 불러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 말러의 '죽은 아이들을 그리는 노래' 제1곡 듣기.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다음날 아침의 부모의 심정을 노래한다.)

 
아프가니스탄에 억류돼 있던 분당 샘물교회 신도들이 돌아왔습니다. 안타깝게도 두 사람은 주검이 돼 먼저 돌아왔지만 나머지 사람들이라도 살아돌아온 게 그나마 다행입니다. 살아돌아간다는 확신조차 하기 어려웠던 42일 간의 억류생활이 인간으로서 그들을 한층 더 성숙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종교인으로서의 신앙심도 한 차원 더 높아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층 더 성숙하고 한 차원 달라져야 할 것은 살아돌아온 신도들 만은 아닙니다. 대한민국 종교가 모두 달라지고 한층 성숙해지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종교가 세상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세상이 종교를 걱정하는' 일이 계속돼선 안됩니다. 기독교가 '개독교'란 비아냥거림을 들어서도 안되겠지요.
 
한국에서는 지식인층에게서조차 종교와 신앙의 문제로 들어가면 남의 종교는 배척하고 인정하지 않는 근본주의적 성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선 이슬람 근본주의자인 탈레반이나 알카에다와의 차이점을 찾기 어렵습니다.

최소한 신앙고백으로서의 종교와 사회적 현상, 역사적 사실로서의 종교를 구분하려는 노력은 해야 합니다.
 
죽음과도 맞설 정도의 예술가의 암울한 삶이 역으로 그들의 작품을 위대하게 만들고 후세 사람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게 합니다. 종교도 자신들의 세력확장을 꾀할 게 아니라 공통체의 고통을 자임해서 짊어지는 일부터 먼저 하기를 기도합니다. 그게 가장 강력한 선교수단이기도 합니다. '금관의 예수'가 아니라 '가시면류관의 예수'로 돌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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