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4막 박근혜, '조연'이 된 그의 5막은?](https://thumb.mt.co.kr/06/2007/08/2007081917394797270_1.jpg/dims/optimize/)
"수출을 늘리기 위해서는 전자산업을 집중 육성해야 한다"는 김완희 박사의 말에 대학에서 전자공학과를 선택한 것도 이때다. 대학졸업 후에는 대학교수가 되겠다는 목표로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
이때부터 5년간 박 후보는 퍼스트레이디 역을 대신한다. 슬픔을 느낄 겨를도 없이 빠듯한 일정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박 후보의 인생 3막은 또다른 총성으로 시작됐다. 1979년 10월 26일 부친은 김재규가 쏜 총탄에 목숨을 잃는다.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 전한 박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에 "지금 전방의 상태는 어떻습니까"라던 박 후보의 말은 유명한 일화다.
청와대에서 양 부모를 잃은 박 후보는 11월 신당동으로 이사한다. 그리고 20여년이 가까운 세월 동안 육영재단 등 사회활동에 전념한다.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독서와 글 쓰는 일에도 몰두했다. 박 후보는 공직에 있으면서 누리지 못한 자유로 인생 3막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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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막은 외환위기에서 촉발됐다. 98년 박 후보는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라며 '달성대첩'으로까지 불리는 보궐선거전에서 당선, 정계에 입문한다.
![인생 4막 박근혜, '조연'이 된 그의 5막은?](https://thumb.mt.co.kr/06/2007/08/2007081917394797270_2.jpg/dims/optimize/)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한 박 후보는 노무현 후보 등과 손을 잡으라는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성향과 정체성이 다른 후보와는 함께 갈 수 없다는 이유 때문.
이후 2002년 당시 이회창 대선후보가 박 후보에 사과, 당에서 정치개혁방안을 수용키로 하면서 이 후보의 선대위원장으로 복귀한다.
2004년 탄핵역풍 속에 당 대표직은 떠안은 박 후보는 천막당사를 거치면서 무너진 한나라당을 살린 일등공신이 됐다.
그리고 2007년 당내 경선에서 대통령직에 출사표를 던진 박 후보는 제5막을 꿈꿨다. 그리고 그는 온 힘을 다해 그만의 가진 저력을 그대로 보여줬다. 그러나 결과는 기대했던 것과 약간 달랐다. 이제 방향을 수정해야 한다. '주인공' 자리 대신 보조하는 '조연'으로 자신을 낮춰야 한다. 그의 5막 인생은 여전히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