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혁당 사건은 사법살인' 32년만에 무죄(상보)

머니투데이 양영권 기자 2007.01.23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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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 재건위 사건 무죄 판결 직후 사건 관련자 가족들이 소감을 밝히고 있다. 가운데는 사형을 당한 8명 중 한명인 하재완씨의 부인 이영교씨. 인혁당 재건위 사건 무죄 판결 직후 사건 관련자 가족들이 소감을 밝히고 있다. 가운데는 사형을 당한 8명 중 한명인 하재완씨의 부인 이영교씨.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재판장 문용선 부장판사)는 23일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연루된 고(故) 우홍선 송상진 서도원 하재완 이수병 도예종 여정남 김용원씨에 대한 재심 사건 선고 공판에서 무죄 판결을 내렸다.

우씨 등이 1975년 4월8일 대법원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18시간만인 이튿날 오전 6시 사형이 집행된지 32년여만이다.



◇"고문으로 인한 진술, 증거능력 없다" = 재판부는 이 사건과 관련해 국가보안법 위반과 내란예비 음모, 반공법 위반 혐의는 무죄 판결을 내리고,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은 이미 폐지된 법률이라는 이유로 때문에 면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우선 모든 피고인들에 적용된 인혁당 재건 사건과 관련한 반국가 단체 구성 혐의에 대해 "수사기관에서 작성된 진술조서의 증거 능력이 없으며, 일부 공판 조서는 증거능력이 인정되나 증명력이 없다"고 무죄 판결 이유를 밝혔다.



재판부는 경찰 수사 과정에서 작성된 것 중 피고인들이나 공범에 대한 조서는 피고인들이 이를 부인하고 있어 증거로 채택할 수 없고, 공범이 아닌 사람들에 대한 조서는 변호인들이 동의를 하지 않으므로 증거능력이 없어 역시 증거로 채택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또 검찰 수사관에 의해 작성된 피고인 등에 대한 조서의 경우 진술자들이 중앙정보부에서 구타와 가혹행위를 당해 정신적으로 위축된 상태였고, 피고인들이 영장 없이 체포돼 장기 구금된 상태였으며, 여러 피고인들이 검찰관에게 무형의 위압감을 느끼고 일부는 검찰관에게 직접 폭행을 당했다는 사실 등을 인정했다.

재판부는 "검찰 진술 때도 고문 등으로 임의성 없는 상태에서 계속 조사를 받은 점이 인정된다"며 "특별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에서 진술이 이뤄지지 않았고, 진술의 임의성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못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법정에서 작성된 공판 조서에서 피고인 일부의 피의 사실과 부합하는 진술이 있지만 진술 내용 자체가 모순되는 것이 상당했고, 항소 이유서에는 모두 혐의 사실을 부인하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진술의 신빙성이 없고, 증명력이 없다"고 덧붙였다.

◇"민청학련, 국헌문란 단체 아니다" = 재판부는 또 여정남씨에 적용된 민청학련 관련 혐의에 대해서도 유죄를 인정할만한 증거가 없다고 판단하는 한편 민청학련 자체에 대해서는 '국가나 국헌문란을 목적으로 한 단체'라고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변호인이 증거에 동의해 증거 능력을 갖춘 진술이 상당 수 있지만, 경찰과 중정에서의 구타와 가혹행위에 따른 증언이었음이 인정되고,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중정이 재판에 관여하거나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여진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어 "따라서 진술서에 허위 사실의 개입 여지가 없거나 특별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에서 진술이 행해졌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이 역시 증거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특히 당시 민청학련의 주도적인 인물인 이철 유인태 등이 전국적으로 동시다발적인 학생 데모를 일으키려 노력하고, 연락망을 구축한 사실도 인정되나 학생 데모의 목적이 유신 타파와 민주회복으로 보이지 정부 전복이나 공산정권 수립 목적으로 볼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재판부는 "민청학련 조직 자체도 체계와 강령이 인정되지 않고, 국가와 국헌을 문란할 목적을 가졌다고 인정하기 부족하다"고 덧붙였다.

이밖에 송상진 하재완씨가 북한 방송을 청취하고 대학노트에 이를 적은 사실과 관련한 반공법 위반 혐의에 대해 재판부는 "북한방송을 청취하고 수록한다 해도 이를 배포하거나 이를 자기 주장화 해 널리 알렸다는 증거가 없다"며 무죄 판단 이유를 밝혔다.

재판부는 다만 여정남씨의 경우 인혁당 사건과 별개로 대구지역에서 반독재 구국선언문 초안을 작성해 교부한 혐의(반공법 위반)로 기소돼 대구지법에서 재판을 받던 중 차후 인혁당 재건위 사건과 병합된 부분에 대해서는 징역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이 부분에 대해서도 형식상 재심개시 결정의 효력이 미치나 재심 사유는 없다"며 "원래 판결에서 확정된 부분을 뒤집고 이 법원에서 새로운 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고 밝혔다.

◇사형 피고인 가족이 대신 판결 받아 = 이날 공판에는 피고인들이 모두 사망했기 때문에 아내와 누나 등 유족들이 피고인석에서 무죄 판결을 들었다. 일부 피고인 유족은 판결 도중 가혹행위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북받치는 감정을 참지 못해 소리를 내 흐느끼기도 했다.

200여명을 수용하는 법정은 사건 연루 당사자와 유족, 시민단체 관계자들로 가득찼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복역한 이철 철도공사 사장, 유인태 장영달 열린우리당 의원이 방청석에서 선고 공판을 지켜봤다. 대권주자인 열린우리당 정동영 전 의장도 공판에 참석해 방청객들과 악수를 나눠 눈길을 끌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1974년 4월 중앙정보부가 민청학련을 수사하면서 배후 조종 세력으로 인혁당 재건위를 지목, 관련자 8명이 사형 판결을 받고 집행된 사건이다. 이른바 '사법살인'이라 일컬어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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