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 않다. 대형주는 전문가인 수많은 외국인, 기관이 눈독을 들이고 있기 때문에 저평가된 종목이 없다. 개인은 인기가 없지만 기업가치에 비해 절대적으로 제값을 받지 못하는 중소형주를 찾아야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장기 투자 성적도 워렌 버핏보다 훨씬 낫다”고 했다. ‘그 비법을 일반투자자들에게 한 수 가르쳐 줄 수 없겠느냐’고 했더니 흔쾌히 긍정적인 답변을 보냈다.
실명은 밝히지 말고 조씨라고만 써달라고 했다. 주변에서 부르는 별명이 있을 거라고 물었더니 “다들 압구정동 ‘교주’(敎株)라고 부른다. 처음에는 ‘주도사’라는 칭호로 불렸으나 최근 자신을 따르는 매니아들이 늘며 교주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했다. 많은 추종자가 있다는 뜻과 더불어 주식을 가르친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10년 전 200만원으로 다시 주식투자를 시작해 현재 주식자산만 60억원이 넘는다고 소개했다. 그래서 교주라는 별명을 이의없이 따라 쓰기로 했다.
오랜 기간 그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집하고 있다. 일례로 컴퓨터 전원을 처음 켜본 게 3년전이었다. 한 증권사가 여의도에서 투자설명회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새로운 얘기가 있을 것 같아 참석한 자리에서 컴퓨터를 처음 켜 봤다고. (당시 설명회를 하던 증권사 직원은 지금 자신의 제자가 돼있다.) PC가 투자의 보조수단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지만 그는 이를 무시하고 수십 년 전의 스타일을 고집하고 있었다.
그의 투자 역사는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뉜다. 눈치 챘겠지만 전반기 10여년은 실패, 후반기 10년은 성공이다. 후반기 성공률을 100%. 종목에 투자해 손해를 본 예가 없었다. 그는 증권카드만 15개를 갖고 있다. 자주 쓰는 건 3~4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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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담한 실패 그리고 재기=전반기 실패의 후유증은 컸다. 80년대 중반까지 그는 남부럽지 않은 성적을 냈다. 그러다 80년대 말 1000을 넘던 지수가 92년 500 아래로 밀렸다. ‘나의 종목선택이 옳다’고 끝까지 믿었다. 그러나 장이 망가졌고 답이 나오지 않았다, 버틸 수가 없었다. 은행에서 융자도 받고 남의 돈도 운영하고 있었다.
결국 ‘깡통’이 났고 주식을 다 팔고 부채를 정리하니 마이너스였다. 남은 빚에 대한 한달 이자만 200만원을 넘었다. 지금으로 치면 1000만원의 가치가 있는 돈이다. 막다른 골목이었다. 어느 날 새벽 경기도 이천에 있는 다리에 올라갔다. 자살을 하려고 난간에 올라섰으나 더 이상 용기가 없었다. 내려오니 다리에 힘이 없었다. 2시간동안 다리 위에 앉아 있었다. 많은 생각을 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운이 없었다’는 생각도 했고 ‘나의 고집이 문제였다’는 반성도 했다.
주변에선 한 달에 150만원을 줄 테니 부동산 중개업을 해보자는 권유도 있었다. 작은 돈은 아니었다. 하지만 빚조차 댈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러다 지인이 장사는 힘들지만 돈이 된다며 수퍼마켓을 해보라고 권유했다. 고덕동에서 시작했다. 15년전이다. 5년간 정말 하루도 쉬지 않았다. 교주는 “당시 세계에서 제일 열심히 일했다”고 자신했다. 새벽에 나가 새벽에 들어오고 집에서는 잠만 잤다. 5년 동안 친척 장례식 때 단 이틀만 쉬었다. 이 기간 빚을 다 갚았다.
주식에 대한 미련은 버리지 못했다. 힘든 나날이었지만 새벽에 들어오면 신문의 주식시세판을 매일 보았다. 그러다 코를 신문에 묻고 잠을 든 적이 많았다. 자고 일어나면 코끝이 검었다. 그는 “그 덕에 시세판을 다 외웠다. 대한민국에 상장된 전 종목을 훤히 꿰는 실력을 쌓았다”고 강조했다. 코스피와 코스닥, 관리종목, 중소형주를 가리지 않는다. 이중에서 최고의 저평가 종목을 찾는 게 그만의 비법이다. 교주는 “내가 선택한 기업은 우리나라에 상장된 1800개 기업중 가장 저평가된 종목”이라고 자부했다.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안겨줬지만 그는 그만의 투자방식이 근본적으로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고 주식투자가 나쁜 게 아니라는 인식도 바꾸지 않았다. 주식을 공부하면 할수록 어떤 재테크보다 건전하다는 신념이 강해졌다. 부동산 투자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