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인간적으로 파업 못한다"

머니투데이 박창욱 기자 2006.02.23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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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한국 CEO 그랑프리 '아름다운 CEO'상 ―박종규 KSS해운 고문 인터뷰(하)]
 
"난 인간적으로 파업 못한다"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이런 말을 남겼다. "너에게 해를 끼친 자가 너보다 강하다면 너 자신을 용서하라. 반대로 해를 준 자가 너보다 약하다면 그를 용서하라."

너그럽게 용서하는 마음은 강한 자가 가지는 특징이다. 더 많이 알수록, 더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이 용서할 수 있는 법이다. 기업가가 노동조합를 대하는 이치도 이와 마찬가지다
 
박종규 KSS해운 고문은 한국선주협회 해무위원장으로 오랫동안 활동하며 해운업계의 노사관계 안정에 힘을 쏟았다. 노조 간부를 지낸 경험을 바탕으로 노조를 잘 이해했다.



그래서 늘 합리적인 협상을 벌였다. "사업 자체나 노사관계 모두 기본은 신뢰입니다. 사람 사는 일엔 믿음이 깔려 있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회사가 먼저 직원들에게 잘 대해줘야 해야 합니다."
 
# 자진 파업 철회
 
사업초기부터 그는 직원들의 믿음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어렵던 시절에도 취직을 조건으로 뒷돈을 받는 일을 절대 금했습니다. 그리고 갑판선원 한사람까지도 인사카드를 보며 이름을 모두 외워 불러줬습니다. 또 사업이 잘 되면 이미 합의된 상여급 외에 별도로 추가 보너스를 지급했구요. `여러분들 덕분에 이익이 많이 났다`는 공문을 함께 돌리면서 말입니다."
 
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10.26 사태 다음날 위기가 닥쳤다. "정국이 뒤숭숭하면서 들어올 큰 돈이 갑자기 묶여 버렸습니다. 때마침 전 지방 출장을 와있어서 해결할 물리적인 시간도 없었구요. 은행 자금결제 마감시간까지는 세 시간 남아있었습니다. 할 수 없이 전 직원들에게 비상상황이니까 모든 방법을 동원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결과는 놀라웠다. "목표보다 2000만원이나 많은 돈이 모였습니다. 비상금과 예금을 헐고, 심지어 친척돈까지 빌린 사람도 있었지요. 직원들의 애사심을 가슴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1979년부터 1984년까지 5년간 KSS해운은 극심한 해운 불황을 겪고 있었다. "당시 하루하루가 지옥일 정도로 자금이 힘들었습니다. 어쩔수 없이 급여가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오랫동안 참아주던 선원들도 화가 나서 파업을 추진하고 있었지요. 파업 전날 마지막으로 노조위원장이 항의하러 본사에 왔습니다. 저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저 소주나 한 잔 하고, 저희 집에서 한잔 더 한 후 돌려보냈죠."
 
뜬 눈으로 밤을 샜다. 만감이 교차했다. 파업이 일어나면 자금사정이 더 어려워지고, 결국 회사가 쓰러지고야 만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노조가 파업을 자진철회했다는 연락이 왔다. 나중에 전해 들은 자조지종은 이랬다. "노조위원장이 밤차를 타고 내려가 선원들에게 `사장집에 가봤더니 선장 사는 것보다도 훨씬 못하더라. 그렇게 사는 사장이다. 그동안 회사를 위해 그렇게 노력했는데 난 차마 인간적으로 내 입으로 파업한단 소리를 못하겠다`고 설명했답니다."
 
# 너무 몰아붙이면 안 돼
 
노조 문제에 대해 박 고문이 생각하는 해법의 출발은 바로 `아량`이었다. "기업들은 노조 간부를 지낸 직원들을 봐주지 않습니다. 노조를 관두면 갈 데가 없도록 만들어 버리는 경우가 많지요. 그러다보면 어쩔수 없이 과격해지고 정치적으로 됩니다. 그렇게 너무 몰아붙이면 안됩니다. 회사로 복귀한 뒤에도 자리를 만들어줘야 합니다."
 
온건하게 대하면 노조도 온건한 입장이 된다는 의견이었다. "돌아갈 곳이 있는데 막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더 나가 노조간부 가운데서도 경영자로 당당히 승진하는 사람이 나와야 합니다. 일본기업 CEO 가운데엔 그런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노조 선배들이 승진해서 경영자로 진출할 수 있다면 과격한 대결구도는 자연스레 없어질 수 있습니다. 또 노조의 반기업 정서도 어느정도 완화시킬 수 있구요."
 
말이 나온 김에 반기업 정서에 대한 의견도 물었다. "모든 일엔 좋은 면과 나쁜 면이 동시에 있습니다. 외국기업이라고 다 좋은 것도 아니고, 그들도 정경유착을 한 과거가 있지요. 하지만 그들은 과격하게 말해서 `개같이 벌어도 정승같이 쓴다`는 정신을 보여주었습니다. 재벌도 그렇게 봐야 합니다. 분명 우리 경제 발전에 큰 공이 있지요. 하지만 적어도 5대 또는 10대 재벌 가운데서 존경받는 기업이 하나 정도 나와주지 못한 점엔 큰 아쉬움이 있습니다."
 
# 대륙법
 
박 고문은 현재 규제개혁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올 3월이 임기만료다. 국민들에게 꼭 알리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었다. "활발한 기업활동을 위해 장기적인 계획을 잡아 기본적인 법체계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건 건 해도 된다`는 대륙법 체계가 아니라, `이것만 지키면 나머지는 다 해도 된다`는 영미법 방식으로 말입니다."
 
이유를 물었다. "규제하는 행정은 누구나 합니다. 그보다는 장려하는 행정을 해야 합니다. 또 온갖 규제로 보호하는 행정은 기업에겐 마약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기업은 경쟁해야 합니다. 경쟁은 고생이 아니라 체력을 튼튼하게 하는 과정입니다. 기업가는 경쟁의 원리를 잊어선 안됩니다. 경쟁하지 않는 기업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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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규 고문은...

박종규 KSS해운 고문은 1961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국영기업인 대한해운공사에 입사해 10년동안 재직하면서 거의 우리나라 최초라 할 수 있는 우리사주조합 운동을 펼쳤다.
 
박 고문은 1970년 KSS해운을 설립, 이전까지 불모지였던 화학약품 등 특수화물 운송 분야에 뛰어들었다. 그는 우리나라 해운 산업의 태동기를 온 몸으로 부딪히며 해운산업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한국선주협회 부회장과 해무위원회 위원장 등을 맡아 일하면서 노사화합과 해운인력 양성 및 법제 개편 등을 주도했다.
 
뿐만 아니라 박 고문은 KSS해운을 `작지만 강한` 회사로 키워냈다. 업계에서 `작은 거인`로 불리는 KSS해운은 대형 가스선 분야에서 동남아 굴지의 선단을 갖추고 있으며, 외환위기 당시에도 연속 흑자를 기록할 정도로 탄탄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 또 1995년부터 국내 유일의 남북 직항로 사업을 꾸준히 수행해오고 있다.
 
해운업계에 끼친 이같은 발자취에 더해 박 고문은 우리나라의 바람직한 경영자상을 만드는 데도 매진해왔다. 그는 과거 해운업계의 고질적인 병폐였던 `리베이트`와 밀수를 근절하는 데 선구자 역할을 해냈다. 회계결산도 직원들이 알아서 수행하도록 해 분식회계의 뿌리부터 근절했다. 아울러 본인 소유의 주식까지 출연해가며 우리사주조합을 결성했고, 경영권을 자식에게 세습하지 않고 굳건한 전문경영인 체제를 만들었다.
 
바른경제동인회 활동을 통해 기업의 신용카드 사용에 따른 세금공제 제도를 도입하는 데 앞장서며 바른 경영을 위한 사회적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유서쓰기 운동` 등 다양한 시민사회 활동을 펼쳤다. 현재도 규제개혁위원장으로 활동하며 기업활동을 뒷받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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