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산을 오르는 이유는

이해익 리즈경영컨설팅 대표 2005.06.02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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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에세이]잃어버린 세대, 해방둥이의 초상

1945년 8월15일. 감격의 함성이 소리 높았다. 해방이 됐고 광복(光復)이 됐기 때문이다. 일제 억압을 벗었다. 해방의 의미다. 어둠에서 빛을 찾았다. 광복이다.

얼마나 좋은가! 기쁨의 함성과 빛나는 광복 언저리에 태어난 세대, 해방둥이들-해방되던 해에 태어났다고 해서 붙여진 별칭이다- 은 행운의 상징이었다.



태어나자 해방이 되었다고. 또 광복이 되자 태어났다고. 그래서 늘 가족 속에서도 사랑을 받았다. 그런 그 첫 한글세대인 해방둥이가 이제 초로(初老)가 됐다.

6·25, 4·19, 5·16쿠데타, 유신, 12·12쿠데타, 6·10민주항쟁, 88올림픽, 남북정상회담, 월드컵의 함성과 여중생추모촛불시위를 겪었다. 그들은 30~40대 중년에 오일 달러를 벌어들이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등 중동을 누볐다.



와이셔츠와 전자렌지를 팔기 위해 바이어를 만나서 술도 퍽이나 많이 마셔대야 했다. 그저 돈보다 일이 좋아서 뛰어다녔다. 그래서 대부분 워커홀릭(workaholic)환자가 됐다. 텔랙스에서 팩스로, 팩스에서 이메일 모두를 거치면서 숨 가쁘게 살아왔다.
 
◇격동의 세월 보낸 세대
 
그러다가 50이 넘어서 자리 잡고 열매 좀 따나 싶을 때 덜컥 IMF 외환위기로 온 나라가 공포 속에 휩싸이게 됐다. 그들은 일차적으로 명예퇴직, 조기퇴직, 황당한 퇴직을 당했다. 일자리를 잃었다. 이게 61세 해방둥이들의 초상이다.

만감이 교차한다. 약간은 서글프고 허전하고 불안하고 막연하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넋두리하기에는 체면이 허락지 않는다. 초로의 해방둥이들. 또 그 언저리의 나이 또래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가정적으로 그들은 참 묘한 위치에 있다. 맏아들로 태어난 경우 그들은 대체로 부모를 모셨다. 설사 모시지 않더라도 매우 미안하고 죄송스러운 마음속에서 사는 게 그들이다.

둘째아들이라 하더라도 맏형이 영악하게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면 자연스레(?) 부모를 모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식에게 그들을 모시라고 말은 커녕 낌새도 낼 수 없다. 그들의 젊은 시절 막 시작된 산아제한 정책으로 둘만 낳아 잘 키운 덕분이다.


'오냐오냐' 키운 그들의 자식은 거의 모두 외아들, 외딸 들이다. 그 자식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받기만 했지 주는 습관을 익힐 기회가 없었다. 여하튼 해방둥이 그들은 늙어가면서도 가정적으로 비빌 언덕이 없다. 아마도 부모를 모셨지만 모심을 당하지 못하는 첫 세대가 될 것이다.
 
◇등산으로 때우는 미래대책?
 
둘째, 경제적으로 막연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20대까지 배우고 군대갔다 와서 30~40대에 일 열심히 했다. 막상 50대 열매를 맺으려다 외환위기 된서리를 맞았다. 노후 대비를 위해 결실을 딴 경우가 흔치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국민연금의 혜택도 누릴 세대가 아니다. 직업별로 연금이 빵빵한 군인, 공무원, 교원출신 빼고는 대부분 그림의 떡이다.

셋째, 급속히 고령사회로 치닫고 있는 세상이다. 이 속에서 해방둥이는 어쩌면 30년 이상 중년 노릇을 해야 하는 첫 세대일 것이다. 그들이 태어난 1945년 쯤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38세 정도였다. 그러나 2002년의 평균수명은 남자 73.4세, 여자 80.4세다. 태어났던 시절보다 곱절이 됐다.

그들 중학교 시절만 해도 환갑이면 동네잔치였다. 그러나 요즘 대도시에서는 70세 이하인 경우 노인정 출입도 언감생심이다. 그러니 50대에 사회에서 퇴출당하고 어디 갈 곳도 마땅치 않다. 꼬불쳐 놓은 돈도 거의 없다.

그래서 제일 걱정은 죽지도 않으면서 돈이 팍팍 드는 병이 나는 거다. 경제적으로 가정적으로 국가적으로 기댈 곳이 없으므로 건강유지를 위해 필사적이 될 수밖에 없다. 이쯤 되면 만만한 게 등산이다.

대도시 근교의 산 속마다 온통 넘쳐나는 게 초로의 등산객이다. 가정과 사회에서 마땅한 역할을 잃어버린 세대에 대한 국가적 대책마련이 필요하다. 고령화·저출산 충격에 대한 주요 착안점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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