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손'에 사기친 '더 큰 손' 사기범
윤씨 등은 또 다른 사기사건으로 구속됐다 98년 광복절 특사로 풀려났던 장씨에게 "전직 대통령의 구권 화폐를 관리하고 있는데 수표로 바꿔주면 사업상 편의를 봐주겠다"며 21억원 상당의 수표를 받아 가로챘다.
장씨는 체포되면서 눈물을 흘리며 "나는 피해자이며 억울하다"고 항변했고, 법원에 출두해 "지하자금인 구권을 유통시켜 경제를 살려야겠다는 생각이었다. 한때의 큰 손이 이런 유치한 사기극을 벌일 정도로 돈이 궁하지 않다"고 강조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CIA 요원 사칭, 첩보영화 뺨친 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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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6월에는 첩보영화를 뺨치는 치밀한 각본으로 벤처기업 대표 등을 상대로 수십억원대 사기행각을 벌인 구권화폐 사기단이 적발됐다.
유모씨 등 2명은 2003년 1월 벤처기업 대표 강모씨와 박모씨에게 "나는 한국에서 지하자금을 양성화하는 책임을 맡고 있는 미국 중앙정보국(CIA) 비밀요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접근, "구권화폐에 30억원을 투자하면 200억원을 주겠다”며 사기를 쳤다.
이들은 자신을 정보부대 장교 출신이라고 소개하며 "노태우 정권 때 통치자금으로 숨겨 둔 구권화폐가 금융실명제 시행 이후 지하에서 썩고 있다"며 투자를 권유했다. 또 피해자들 앞에서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직원으로 가장, 또 다른 일당에게 미 연방채권 구입대금으로 12억원을 지급하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잘 알려진 바이오벤처업체인 H사를 설립한 강씨와 박씨는 사기단에게 각각 36억원, 10억5000만원을 구권화폐 구입자금으로 건넸다.
◆'5ㆍ6공 정치실세' 비자금 신권교환설
지난 1994년 이전에 발행된 1만원권 화폐인 구권화폐는 컬러 위조시 물결문양이 드러나도록 지폐 중앙에 은빛 세로선을 넣은 요즘 신권화폐와 구별된다. 법화(法貨)로서의 구매가치는 현재의 1만원 신권과 동일하다. 그렇다면 명동 등 주요 사채시장에 웃돈을 얹은 구권을 신권으로 교환해주겠다는 구권화폐 금융사기가 끊이지 않는 이유는 뭘까.
이는 1993년 8월 금융실명제가 전격 실시됐지만, '5ㆍ6공 정치권 실세들'이 천문학적 금액의 구권을 미처 신권으로 바꾸지 못해 지하에 숨겼다는 소문이 그럴싸하게 포장됐기 때문이다. 구권화폐 소문은 특히 총선과 대선이 있는 해에 세간의 이목을 끌곤 했다.
구권화폐는 실체확인이 어렵기 때문에 사기단은 통상 정치권과의 친분설 등을 내세우며 '뒤탈은 없다'는 말로 투자자들을 현혹한다. 구권이 한국은행을 거치지 않고 조폐공사에서 직접 유출됐다는 소문도 있지만, 현재까지 은행으로 들어온 구권이 확인됐다는 얘기는 나오지 않고 있다.
한 사채업자는 "한 2년간 잠잠하더니 최근 구권화폐를 바꾸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며 "요즘은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박스에 담긴 구권화폐 사진까지 지니고 다닌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