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어정쩡 정책, 어정쩡 경제

머니투데이 성화용 기자 2005.02.16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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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출자총액 규제ㆍ동탄 반도체공장 지원 등 어정쩡한 입장 되풀이

경제정책이 중심을 못잡고 있다. 말과 실제가 따로논다. 기업하기 좋은나라를 만든다고 하면서 반기업정서의 눈치를 본다. 기업이 투자를 늘려야 한다고 하면서 투자를 막는 장애물을 치우는 것도, 그대로 두는 것도 아닌 어정쩡함. 경제주체들은 혼란스럽다.

존폐 논란이 끊이지 않는 공정거래법상의 출자총액제한제도가 대표적이다. 규제 기준을 자산 5조원에서 6조원으로 늘리든, 재계의 요구대로 20조원으로 늘리든 마찬가지다.



단 하나의 기업집단이라도 이 제도에 걸려 하고 싶은 투자를 못하면 규제다. 정답은 없다. 5조원, 6조원, 7조원, 20조원 모두 계산해서 나온 절대값이 아니다. 그저 자의적으로 들이 댄 숫자일 뿐이다.

5조원에서 6조원으로 늘리니 CJ 신세계 LG전선 등의 기업집단이 규제에서 빠진다고 하지만 이들의 성장이 눈부셔 자산 6조원을 훌쩍 넘어서면 다시 규제에 걸린다. 규제를 생각해 자산을 늘리지도 말고 성장 전략도 다시 짜라는 얘긴지 헛갈린다.



더욱 중요한 건 출자총액 규제가 던지는 메시지다. 정부와 여당은 기업집단(재벌)의 소유·지배구조를 못마땅해 하고 있다.

지난해 말 대기업의 지분 메트릭스를 공개한 것도 그 연장선상이다. 별 의미가 없다면서도 정보 공개를 강행했다. 재계는 '오너들이 2%밖에 안되는 지분으로 기업을 지배하고 있다'는 걸 새삼 강조해 '반기업정서'에 불을 붙이는 결과가 됐다고 반발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처럼 참여정부가 '기업의 불안정(또는 불합리)한 소유·지배구조'를 우리 경제 초미의 과제로 진단하고 있다면 당정이 출자총액제한제도를 강화해도 할 말이 없다. 금융계열사 의결권도 제한폭을 더 키워야 마땅하다.


문제는 이도 저도 아니라는 데 있다. 이해찬 총리는 15일 국회에 나와 "현 단계에서 출총제를 폐지하는 건 기업의 소유·지배구조 문제 등을 봤을 때 어렵다"면서도 "기업들이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해 투자를 하는 경우 탄력적으로 조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총리의 출자총액에 대한 이날 언급이 바로 정부 여당이 취하고 있는 어정쩡한 '양다리 걸치기'의 실체다.

'한국을 대표하는 간판기업들이 계열사 상호출자를 통해 총수의 지배 지분을 확보하고 있는 불합리한 현실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다' 는 논리와 '기업이 열심히 하지 않으면 경제가 살아나지 않기 때문에 도와야 한다'는 논리의 접점을 찾지 못한 채 헤매고 있는 기색이 역력하다.

양쪽 모두를 포기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혼란은 이 뿐 아니다. 동탄 반도체 공장 부지 매입을 둘러싸고 삼성전자와 한국토지공사가 가격 문제로 맞서 결론을 못내리고 있는데, 조정에 나선 정부는 두달째 '부처간 이견 조율중'이다.

그것도 당초 유관 부처에서 '토지대금을 깎아주는 대신 토지대금을 10년 이상 장기 무이자 분할 납부 방식으로 지원하자'는 안을 제시했지만 '형평성 시비'를 우려해 기간을 '5년'으로 줄였다. 이자를 얼마나 받을 것인지를 조율한다고 하지만 이 쯤되면 실질적인 지원효과는 거의 없다.

국가 기간산업 발전을 위해 투자하는 것이니 도와주기는 해야 겠고, 잘나가는 대기업에 왜 혜택을 더 주느냐는 논란에도 휘말리기 싫으니 결국 '지원해주는 흉내'만 내는 것으로 마무리 지을 셈이다. 구체적인 내용만 다를 뿐 출자총액제한 기준을 5조원에서 6조원으로 올린 것과 거의 유사한 과정이요, 결론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연초 국정 연설의 90%를 '경제 살리기'에 할애하며 "기업하기 좋게 만들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용섭 국세청장은 지난 달 전남대를 방문해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것이 국세청의 존재 이유"라고 말했다.

산업자원부는 기업하기 좋은 환경조성을 위해 416건 규제에 대한 검토에 착수해 하반기까지 '수요자' 중심의 규제완화방안을 마련하겠다고 공언 했다.

그러나 혼란은 계속되고 있다. 기업들은 '환영한다'고 하면서도 믿지는 않는다. 엉거주춤한 정책이 참여정부 주도세력의 이념적 성향 때문이든, 아니면 '반기업 정서'에 붙어있는 '표'를 의식했기 때문이든, 그것에 의지해 사업을 추진할 수는 없다는 게 기업들의 판단이다.

최근 부산시는 '기업인 예우 조례'를 만들었고 충주시는 지역에 기업을 유치하는 사람에게 포상금을 지급하고 있으며, 대구시는 수천개의 구호를 공모한 끝에 '기업이 살아야 대구가 산다'를 올해 시의 슬로건으로 채택했다.

H그룹의 한 고위 관계자는 "이쪽 저쪽 발을 담그며 저울질 하는 중앙의 정책에 비해 지방자치단체의 직설적인 구애가 훨씬 가슴에 와 닿는다"며 "이러한 믿음이 있어야 기업인들이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해 구내식당 대신 인근 음식점을 이용하게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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