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상이목(同想異目)] 재벌 3~4세 '과도기 오너십'

더벨 이진우 더벨 부국장 겸 산업1부장 | 2018.06.06 04:27
2000년대 중반 해외 가전전시회를 취재하기 위해 인천국제공항 출국장으로 향하는데 낯익은 신사가 스치듯 지나갔다. 옆 모습을 보며 ‘구본무 회장 아닌가’란 생각에 뒤를 돌아보니 수행비서로 보이는 젊은 직원 하나가 달랑 가방 하나만 들고 뒤를 졸졸 쫓아간다. 설마, 그래도 LG그룹의 총수인데. 당시만 해도 ‘회장님’의 출장길에 경영진이 도열해서 배웅하던 모습이 낯설지 않은 터라 잘못 본 게 아닌가 했다. 하지만 나중에 확인해 보니 역시나 구본무 회장이었다. 최근 안타까운 비보에 고인의 소탈한 성품을 기리는 많은 기사를 보며 문득 당시 인천공항에서 짧은 만남이 떠올랐다.

아랫사람들에게도 반말하지 않고, 수행원 없이 경조사를 챙기며,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으로 동네 과일가게에 나타나 수박을 사서 들고가는 옆집 아저씨, 할아버지 같은 모습에 LG와 별 관련이 없는 많은 사람까지 고인을 애도했다. 돈과 권력을 한꺼번에 쥐고 있는 대한민국 재벌이란 이미지를 깨고 그토록 소중해 한 LG에 ‘친근하고 착한 기업’ 도장을 더 확실히 찍어주고 떠났다.

고인은 오너 3세에 속하지만 이건희 삼성 회장, 정몽구 현대차 회장과 함께 한 시대를 누빈 오너 2세에 가까운 경영자다. 창업자인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의 흥망성쇠와 생로병사를 고스란히 목격한 세대다. 드라마에서 흔히 보는 공주님, 왕자님들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임직원도 창업자에 이은 두 번째 세대까지는 기본적으로 존중해준다. 거기에 성품과 능력까지 갖추면 존경심을 보인다. 이 세상에 없던 ‘기업가정신’이란 말을 만들어내며 회사를, 나라를 도약시킨 창업자들의 정신을 공유하거나 계승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오너십’은 그래서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재벌, 오너, 대기업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눈이 달라졌다. 돈과 권력은 특권과 탐욕으로, 경영승계는 온갖 편법과 탈법의 온상으로 치부되면서 광범위한 ‘반기업정서’에 휘말려 있다. 3~4세로 이어지는 오너십은 그 자체가 ‘경영리스크’로 인식된다. 조현민 대한항공 전무의 ‘물컵 갑질’은 아예 불난 집에 기름을 부었다. 임직원은 더이상 그들을 존경하지 않는다. 성품과 능력까지 갖춰야 겨우 존중해 준다고나 할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기업가로서 전통적 ‘오너십’은 점차 희석되고 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재벌 오너십이 새로운 시대 흐름에 맞는 이미지를 찾아가는 ‘과도기’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잘잘못을 떠나 당사자들에게 좀 참혹스럽다. 아예 어릴 적부터 공주님, 왕자님으로 큰 젊은 승계자들은 그렇다 치고 이미 40~50대에 접어든 3세, 4세대들까지 자기도 모르게 숨을 곳을 찾게 만든다. 공(功)은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에게 돌아가는데, 과(過)는 고스란히 자신들 몫이다. 재계 전체적으로도 1~2세대에 비해 결속력이 약해지고 시스템 자체가 느슨해졌다. 속된말로 각자도생하기 바쁘다. 남의 허물이 나한테도 덧씌워지지 않을까 걱정해야 할 때도 있다. 굳이 이름을 거명하지 않더라도 이미 대중적으로 알려진 많은 오너 3~4세 회장, 부회장들이 이 범주에 들어 있다. 나서지 못하고, 심지어 잠행까지 해야 한다.

이러한 불안한, 과도기 오너십은 그 자체로 기업의 리스크다. 세상은 이제 오너 개인의 일탈로 치부하지 않는다. 그 가문을, 기업 전체를 뭉뚱그려 생각한다. 일반인뿐만 아니라 기관투자자들도 오너십에 주목한다. 요즘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개별 오너의 성품과 능력을 계량화한 ‘오너십지수’가 리스크 측정과 투자 평가의 중요한 지표로 떠오를 날이 멀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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