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탑파’, 한류스타가 된 유쾌한 서얼들…호부호형 못 했어도

머니투데이 권경률 칼럼니스트 | 2018.05.19 07:26

권경률의 사극 속 역사인물 83 – 백탑파 : 북학을 설파하고 규장각에 들다

“오랜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맹자’ 일곱 편을 돈 200전에 팔아버렸소. 그 돈으로 밥을 잔뜩 해먹고 희희낙락하며 유득공에게 달려가 자랑했다오. 그런데 이 친구도 굶주린 지 오래 되었던 터라, 내 말을 듣고는 ‘좌씨전’을 팔아서 술을 사더군. 이는 맹자가 직접 밥을 지어 먹여주고 좌구명이 손수 술을 권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소.” (간본 아정유고)

18세기 조선의 문장가 이덕무가 한 편지글에 적은 친구 유득공과의 일화다. 이덕무는 오늘날 ‘간서치(看書癡)’, 즉 책만 보는 바보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그는 하루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못 본 책을 보면 환장하는 최고의 독서가였다. 그럼에도 유교경전인 ‘맹자’를 팔아서 주린 배를 채우고, 좌구명의 ‘춘추좌씨전’과 바꾼 술을 기꺼이 얻어먹는다. 2012년작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등장하는 ‘유쾌한 천재’ 이덕무 캐릭터와 겹쳐진다.

이덕무와 유득공의 희희낙락에는 사실 서글픔이 배어있다. 그것은 바로 가난한 서얼의 설움이다. 조선은 양반가에서 태어나도 첩의 자식과 그 후손들은 벼슬길에 오를 수 없도록 했다. 서얼 출신인 두 사람은 어릴 적부터 책만 파고 살았지만 어차피 과거시험에 급제하기는 글렀다. 그렇다고 달리 호구지책이 있는 것도 아니다. 집에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날이 드물다. 차라리 책을 팔아 단 하루라도 맘껏 먹고 실컷 취하고 싶었을 것이다.

“친구들은 모두 단것만 보면 나를 생각하고 단것이 생기면 나에게 주곤 했는데, 오직 박제가만은 그리 하지 않더군. 그는 세 번이나 단것을 먹으면서도 나를 생각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남이 나한테 먹으라고 준 것까지 빼앗아 먹곤 했소. 친구의 의리상 허물이 있으면 바로잡아 주는 것이 당연하니, 내 대신 박제가를 나무라주기 바라오.” (간본 아정유고)

이번에는 평소 단것에 사족을 못 썼던 이덕무가 장난스럽게 박제가를 책망하는 편지글이다. 이덕무는 단감 100개를 선물 받았으니 보낸 이를 100번 생각한다고 할 만큼 단것을 밝혔다. 그런데 친구라는 작자가 중간에서 가로챘다며 분개한다. ‘달다구리’를 가지고 어린아이처럼 다툰다. 유치하면서도 재미있다. 본인도 즐기고 있다.

박제가도 서얼 출신이었다. 이덕무와는 판이했지만 허물없이 지냈다. 이덕무는 키가 크고 가녀린 반면 박제가는 땅딸막하고 다부진 체구였다. 성품도 이덕무가 섬세하고 신중하다면 박제가는 고집 세고 자기주장이 강했다. 나이도 이덕무가 9살 많았다. 그럼에도 “너무 마음에 들어 즐거움을 견디지 못할” 만큼 서로 통했다고 한다. 박제가는 한겨울밤 해금 연주를 듣다가 눈길을 헤치고 그리운 벗 이덕무를 찾아가기도 했다.

“올 적엔 달빛이 희미했었는데 술 마시다보니 눈이 깊이도 쌓였네. 이때 친구가 곁에 있지 않으면 장차 무엇으로 견딜 것인가. 내게는 즐겨 읽던 ‘이소(離騷)’가 있으니 그대는 해금을 안고 야심한 밤 문을 나서 이덕무를 찾아가세.” (정유각집)
‘이소’는 초나라의 굴원이 지은 장편 시로 조정에서 쫓겨나 임금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담았다. 눈 내리는 겨울밤 박제가와 이덕무가 이 시를 읊조린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박학다식하고 뛰어난 문장을 짓지만 서얼 신분이기에 쓰일 수 없었던 두 사람의 울분이 투영된 것이다. 이 동병상련(同病相憐)이 그들을 ‘백탑’으로 이끌었다.

백탑은 서울 탑골공원에 자리한 국보 2호 원각사지십층석탑을 일컫는다. 멀리서 보면 하얗게 빛나므로 조선시대에는 도성의 랜드마크였다. 1760년대 후반에 이덕무, 유득공, 서상수 등 이 탑 근처에 살던 서얼들이 모여 시문을 뽐내는 모임을 열었다. 백동수, 박제가를 비롯해 남산골 서얼들도 합류했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한을 서로 기대며 다독인 것이다. 세간에서는 이 모임을 ‘백탑파’라고 불렀다.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 백탑파 문인들은 실학자 홍대용과 박지원의 집을 드나들며 새로운 세상을 꿈꾸기 시작했다. 홍대용은 1766년 북경에 다녀와서 ‘을병연행록(乙丙燕行錄)’을 내놓은 북학(北學)의 선구자였다. 북학은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야 조선이 잘 살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것은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학정신에 뿌리를 뒀다. 백성이 이롭게 쓰고 풍족하게 살 수 있다면 ‘오랑캐’ 문물이라도 도입하자는 것이다.

조선의 지배층은 북학에 콧방귀를 뀌었다. 그들은 스스로 ‘소중화(小中華)’라 자부하며 청나라를 경멸했다. 반면 백탑파의 생각은 달랐다. 박제가와 이덕무는 1778년 사신단의 일원으로 북경을 둘러봤다. 중국에는 서얼 차별이 없었고 자기 실력만 갖추면 돈도 벌고 지위도 얻었다. 돌아온 박제가는 ‘북학의(北學議)’를 저술하고 통상무역을 역설했다. 그 이면에는 ‘사농공상’ 신분제의 모순을 꼬집고 지배층을 비판하는 뜻이 담겼다.

백탑파 서얼들이 세상의 주목을 받은 것은 시문 덕분이었다. 그들의 울분은 시어로 승화되어 중국에 이르렀다. 1777년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과 양반 문인 이서구의 시를 엮은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이 북경에서 출간되었다. 이 시집은 중국 문단에서 호평을 받았고 네 사람은 ‘사가시인(四家詩人)’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자 조선에서의 대접도 달라졌다. 요즘으로 치면 해외에서 한류스타로 인정받으며 국내 무대도 평정한 케이스다.

1779년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은 규장각 초대 검서관으로 특채되었다. 규장각은 정조 임금이 인재를 길러내고 통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설립한 학술 및 정책 기관이었다. 주요사업은 서적을 편찬하는 일이었는데 왕은 서얼 출신이지만 실력을 인정받은 세 사람에게 편집과 자문 역할을 맡겼다. 조선 후기 개혁군주 정조의 측근이 된 것이다. 백탑에 깃든 서얼들의 설움과 우정이 새로운 세상의 원동력으로 바뀌는 극적인 반전이었다.

권경률 역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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