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은 어떻게 한반도를 통일했을까?

머니투데이 권경률 칼럼니스트 | 2018.03.24 08:22

권경률의 사극 속 역사인물 79 – 왕건 : 통일의 초석 된 나주공략과 결혼동맹

고려하면 떠오르는 것 세가지만 대보시라. 한 선배의 요청에 ‘무신정권’, ‘삼국유사’와 함께 ‘왕건’을 거론한 적이 있다. 고려 태조 왕건! 만약 조선에 대해 같은 요청을 했다면 이성계를 떠올렸을까. 그렇지 않다. 천년 세월을 뛰어넘어, 조선 태조 이성계와 달리 그가 이토록 존재감을 뿜어내는 이유가 뭘까?

어쩌면 2000년대 초에 방영된 드라마 ‘태조 왕건’ 덕분인지도 모른다. 무려 200회에 걸쳐 왕건의 일대기를 다룬 이 사극은 최고 시청률 60%를 찍으며 국민 드라마 반열에 오른 바 있다. 물론 이성계에게도 ‘용의 눈물’이라는 걸출한 드라마가 있지만 사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이성계가 아니라 이방원이었다.

태조 왕건에게는 뭔가 특별한 게 있는 걸까? 그는 누구나 알다시피 고려를 세우고 후삼국을 통일한 역사인물이다. 그런데 왕건이 드라마에서 주목받은 건 단지 위대한 업적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삶에는 의외로 극적인 요소들이 풍부하다. 특히 교과서에 잘 안 나오는 몇 가지 모습들이 상상력을 자극한다.

먼저 궁예의 신하였을 때 왕건은 전라도 서남해 연안지역을 습격했다. 그는 903년 수군을 이끌고 서남해로 항해한 뒤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가 나주를 차지했다. 후백제의 배후로 돌아가 허를 찌른 대담한 작전이었다. 왕건의 나주 공략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널리 알려지지 않았는데 드라마를 통해 화려하게 재현되었다.

당시 한반도는 신라의 쇠퇴로 혼란이 극심했다. 남쪽에서는 견훤이 후백제를 세워 쓰러져 가는 신라를 압박했고, 북쪽에서는 궁예가 민심을 등에 업고 땅을 넓혀갔다. 견훤과 궁예는 한반도의 패권을 놓고 대립각을 세웠다. 그 와중에 왕건이 후백제의 배후를 공략했고, 견훤은 앞뒤로 적을 맞는 군사적 곤경에 처한 것이다.

20대의 젊은 장수 왕건은 이순신처럼 수군을 이끌고 나폴레옹 식의 배후 기동작전을 펼쳐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했다. 나주를 차지해 얻은 전략적 우위는 군사상의 유리한 여건에 그치지 않았다. 나주는 후백제가 중국과 교역해서 국부를 쌓는 경제 거점이었다. 왕건은 경제의 길목을 장악해서 향후 한반도의 판도를 바꿔버렸다.

전쟁은 총력전이다. 전투력이 뛰어나다고 전쟁에서 이기는 건 아니다. 전쟁을 지배하는 것은 결국 국력이고, 국력의 바탕은 경제력이다. 병력을 무장시키고 물자와 식량을 보급하려면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나주를 잃음으로써 후백제는 국력 신장에 차질을 빚었고 전쟁 수행 능력도 떨어졌다. 길게 볼 때 한반도의 주도권이 왕건에게 넘어간 것이다.

그럼 왕건은 어떻게 후백제의 곳간을 빼앗겠다는 과감한 발상을 하게 되었을까? 그의 집안 내력을 들여다보면 어느 정도 추론이 가능하다. 이 집안은 송악, 즉 훗날 개경의 호족이었다. 조부 작제건이 ‘당나라 귀인의 아들’이라거나 ‘용왕의 딸과 결혼했다’는 설을 곱씹어보면 집안의 성격이 나온다. 중국과의 무역에 종사한 해상세력이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왕(王)’이라는 성씨도 여기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바다 건너 중국에서 사업하려면 ‘비단장수 왕서방’이 되는 게 현실적으로 편리했을 테니. 왕씨 집안에는 동업자도 많았다. 왕건이 서남해를 칠 때 나주 호족들이 후백제를 배반하고 그를 도운 것도 이런 맥락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해상무역에 종사한 그들은 계산기를 두드려보고 견훤 대신 왕건을 택한 것이다.

왕건은 송악과 나주라는 경제 거점을 기반으로 차츰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그는 명목상 궁예의 신하였지만 나라의 틀이 잡히지 않은 때였기에 실상은 동맹에 가까웠다. 동맹에게는 충성이나 의리를 기대하기 어렵다. 동맹은 목적지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일 뿐이다. 현실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동맹을 맺지만, 상황이 바뀌면 적이 되기도 한다.

궁예는 미륵불을 자처하며 백성의 마음을 얻었다. 그가 민의를 내세워 왕권강화와 개혁정치에 나서자 기득권층인 호족들이 반발했다. 북방의 호족세력은 궁예의 대항마로 왕건을 점찍고 힘을 실어줬다. 경제력, 군사력, 정치력의 권력 삼박자를 갖춘 왕건이 왕위에 오르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918년 왕건은 마침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웠다.

그러나 통일로 가는 길은 멀고 험난했다. 후백제의 견훤은 여전히 버거운 상대였고, 각 지방마다 세력가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들 모두와 싸워 이길 힘이 신생국 고려에는 없었다. 왕건은 지방 호족들의 힘을 하나로 모아 견훤과 전쟁을 벌여나가기로 했다. 당시 그가 전가의 보도처럼 쓴 것이 바로 결혼동맹이다.

왕건은 유력 호족들의 딸과 결혼하고 또 결혼했다. 지방 세력의 힘을 빌리려면 담보가 필요했는데, 당시로선 정략결혼만큼 확실한 보장이 없었다. 동맹이야 깨질 수도 있지만 한 집안이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자기 사위인데 믿고 도와야지 않겠나. 그는 온 나라에 가족을 둔 덕분에 936년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통일을 완수할 수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한국사에서 아내가 가장 많은 임금이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왕후 6명과 부인 23명을 합해 무려 29명의 배우자가 있었다. 후일 그의 자식들은 저마다 외가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오르려고 했다. 그 여파로 왕건이 죽은 후 고려에는 엄청난 피바람이 몰아쳤다. ‘정치적 바람기’가 남긴 씁쓸한 유산이라고 해야 할까.

“무릇 천하의 대세란 합해지면 나누어지고, 나누어지면 또 다시 합해진다.”
나관중이 지은 중국 고전소설 ‘삼국지’의 첫 문장이다. 천하의 대세는 항상 분열과 통일을 반복한다. 한반도의 역사도 다르지 않다. 10세기에 왕건은 상인의 현실감각으로 거점을 마련하고 경제력, 군사력, 정치력을 다졌다. 동맹을 넘어 한 가족이 된다는 자세로 힘을 모으고 나라를 통일했다. 작금의 한반도는 어떨까? 운명의 주사위는 던져졌다.

권경률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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