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추문과 권력 남용, 신돈을 무너뜨린 흑심

머니투데이 권경률 칼럼니스트 | 2018.03.10 07:15

권경률의 사극 속 역사인물 78 – 신돈 : 권력의 맛에 중독된 개혁정치가


고려 승려 신돈은 공민왕의 신임을 얻어 개혁정치를 펼친 인물이다. 2005~2006년에 방영된 드라마 ‘신돈’에서 그는 구도자와 요승의 경계를 넘나드는 풍운아로 그려졌다. 극중 신돈은 수행을 통해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려 했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치자 승려의 몸으로 개혁정치에 나섰다. 이 구도자가 나라를 어지럽힌 요승으로 전락한 까닭은 무엇일까?

‘고려사 열전’에 따르면 신돈은 사찰에서 일하던 여종의 자식이었다고 한다. 절에서 자라다보니 승려가 된 것인데, 차츰 불자들 사이에서 비범하다는 평을 얻었다. 홍건적의 침입 때 공을 세운 김원명이 그를 공민왕에게 소개했다. 신돈을 만나본 왕은 마음에 들어 하며 사부로 삼고 나랏일을 맡겼다.

“공민왕은 그가 득도하여 욕심이 적은데다 미천한 출신이라 가까운 무리들이 없으니, 큰일을 맡기면 사정(私情)에 얽매이지 않고 반드시 뜻대로 일을 추진할 것이라고 믿었다.” (고려사 열전)

태생이 미천한 신돈이 공민왕과 사제(師弟)의 연을 맺고 권력의 중심에 선 것은 신분사회에서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여기에는 정치적인 의도가 있었다. 공민왕은 그가 권문세족의 특권을 타파하고 부정부패를 해소하길 바랐다. 그 이면에는 왕을 쥐고 흔들려는 권세가들을 신돈이 민심을 등에 업고 억눌러 줬으면 하는 노림수도 있었다. 도력이 높은 고승은 백성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쉬우므로 자신의 개혁정치에 이용하려 한 것이다.

공민왕이 수행을 그만두고 세상을 구하라고 요청하자 신돈은 일단 사양했다. 백성을 위해 나라를 개혁한다 해도 왕이 대신들의 모함과 이간질에 흔들리면 ‘도로아미타불’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민왕은 맹세까지 하며 승려 신돈에게 거듭 간청했다.

“대사는 나를 구하고 나는 대사를 구할 것이며, 다른 사람의 말에 미혹되는 일이 절대 없을 것을 부처와 하늘 앞에 맹세하노라.” (고려사 열전)

결국 왕의 청을 받아들여 국정의 중심에 서게 된 신돈은 1366년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해 개혁의 첫걸음을 뗐다. 전민변정도감은 고려의 토지와 노비 문제를 바로잡는 관청이었다. 당시 고려의 권세가들은 힘없는 백성들의 땅을 빼앗고 오갈 데 없는 이들을 노비로 삼았다. 그는 권문세족이 불법적으로 취한 토지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줬고,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은 희망에 따라 양민 신분을 회복하게 했다.

땅을 되찾고 노비의 족쇄에서 풀린 백성들은 신돈을 살아있는 부처로 떠받들었다. 그러나 권문세족은 경제적 기반을 침해당하자 격분했다. 요승이 왕의 눈과 귀를 가리고 나라를 말아먹는다고 비방에 열을 올렸다. 그를 제거하기 위한 모의가 줄을 이었다. 공민왕이 음모자들을 벌주고 쫓아내긴 했지만 좀 더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했다.

신돈과 공민왕은 권세가들을 견제하기 위해 새로운 정치세력을 양성하기로 했다. 1367년 성균관을 중건하고 과거시험을 일신한 것은 그래서다. 이색, 정몽주, 정도전 등 성리학을 공부한 유생들이 문벌이 아닌 실력으로 정치무대에 자리를 잡았다. 신돈은 신진사대부를 대항마로 키워 권문세족의 힘을 약화시키고자 했다. 그는 불제자였지만 공자를 찬양하면서 그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안간힘을 썼다.

신돈이 자신의 입맛대로 권문세족을 요리하자 공민왕은 그를 더욱 신임하게 되었다. 살아있는 부처의 권력은 하늘을 찌를 듯이 성대해졌다. 신돈은 점점 권력의 맛에 취해갔다. 상벌을 멋대로 행하면서 마음에 든 사람들은 벼슬을 주었고 눈 밖에 난 자들은 가차 없이 내쳤다. 그러자 관리들은 특혜를 바라거나 위세를 두려워해 앞 다퉈 재물과 노비를 바쳤다. 무소불위의 권력은 그를 인륜에 눈 먼 괴물로 만들었다.

“사대부의 처첩 가운데 어여쁜 여인이 있으면, 사소한 허물을 구실로 그 남편을 감옥에 가두었다. 그리고는 부인에게 사람을 보내 ‘남편의 억울함을 호소해야 죄를 면할 수 있다’는 말을 전했다. 부인이 신돈의 집에 당도하면 말과 시종을 돌려보내게 했다. 내문으로 들어서면 별실에 신돈이 혼자 앉아 있고 옆에는 이부자리와 베개가 놓여 있었다.” (용재총화)

권력의 정점에 선 신돈을 무너뜨린 것은 성추문이었다. 그는 승려의 신분으로 수많은 첩들을 두었을 뿐 아니라 남편을 인질 삼아 부녀자들을 욕보였다. ‘고려사 열전’에는 ‘간음’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엄밀히 보면 권력으로 위협해 ‘겁탈’한 것이다. 실제로 신돈이 욕보이려 하자 관리의 아내가 소리를 지르고 완강히 저항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사실 이 부녀자 겁탈은 혼자 저지른 일이 아니었다. 기현과 그의 처가 신돈의 흑심을 채우는 데 앞장섰다고 한다. 위 성추문의 본질은 권력 남용이며, 그것은 대개 조직적으로 이루어진다. 권력자 신돈의 주위에는 아부꾼들이 들끓었다. 기현과 최사원이 심복이 되고, 이춘부와 김란이 측근이 되어 조정에서 행세하며 나라를 흔들었다.

신돈의 적나라한 권력 남용은 공민왕의 귀에 들어갔다. 그가 사심 없이 나랏일을 처리할 줄 알았던 왕은 크게 실망했다. 공민왕은 더 이상 신돈의 말을 듣지 않았다. 도선의 예언을 거론하며 도읍을 충주로 옮기자고 해도, 오도도사심관 직을 부활시켜 그 자리에 앉으려 해도 왕은 고개를 저었다. 이 불신의 한가운데 성추문이 있었다.

“네가 전에, 부녀자들을 가까이 함은 그 기운을 끌어다 도력을 기르는 것일 뿐 결코 사사로이 정을 통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 들어보니 자식까지 낳았다고 하는데 이런 것이 맹세문에 있었더냐?” (고려사 열전)

마침내 신돈은 공민왕을 시해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붙잡혀 처형당했다. 어찌 보면 토끼를 잡은 후에 사냥개를 삶아먹는 격이지만, 어쨌든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권력은 독기가 세다. 한번 움켜쥐면 휘두르고 싶고, 자꾸 휘두르면 그 맛에 중독된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자리는 괴물도 만든다.

권경률 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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