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면칼럼]테루아와 빈티지

본지 박종면 본지 대표 | 2018.02.19 04:22
와인 용어에 테루아(terroir)와 빈티지(vintage)라는 게 있다. 테루아는 프랑스어로 포도밭의 토양이나 지형 등 전반적 환경을 의미한다. 빈티지는 와인을 생산하기 위해 포도를 수확한 해를 뜻한다.

향과 맛이 복합적이고 좋은 밸런스를 가진 고급 와인을 생산하는 데는 테루아와 빈티지가 결정적이다. 프랑스에선 이미 160여년 전부터 테루아에 따라 포도밭(cru·크뤼)의 등급을 매기고 그 등급에 따라 와인을 평가했다.

와인 품질을 평가할 때 빈티지도 매우 중요하다. 포도 성숙기와 수확기에 비는 적게 오고 맑은 날이 지속돼야 맛과 향이 뛰어난 와인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애호가들은 매년 날씨의 좋고 나쁨을 지역과 포도 품종에 따라 점수화한 ‘빈티지차트’라는 것을 만들어 와인 구매에 사용하기도 한다.

와인평론가 로버트 파커처럼 테루아나 빈티지를 덜 중시하고 와인의 미묘한 맛은 오크통에서 나온다거나 와인 제조 과정의 기술적 요소를 강조하는 사람도 있지만 테루아와 빈티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게 정설이다.

테루아와 빈티지의 중요성은 비단 와인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람에게도 말하자면 테루아와 빈티지는 결정적이다. 최근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성폭력 폭로운동, 이른바 ‘#미투’(Me too) 운동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든다.

현직 여성 검사와 여성 시인, 그리고 여성 극단대표가 폭로한 안태근 전 검찰국장과 고은 시인, 이윤택 감독 등은 이들이 남자라는 사실 외에 공통점이 더 있다. 나이가 쉰 살 넘었다는 점, 자기분야에서 성공한 사람이라는 것, 1950~70년대 남성 중심의 토양에서 제대로 된 젠더의식을 교육받지도 못했고 그게 왜 필요한지도 모른 채 지금껏 살아왔다는 사실 등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번에 여론의 집중포화를 받은 이들 외에도 최소 쉰 살 이상으로 갑의 위치에서 우리 사회를 끌어가는 이 땅의 모든 남자는 오십보백보다. 심하게 말하면 모두가 고은이고 이윤택이고 안태근이다. 하나같이 공범이거나 최소한 방조자다. 단지 운이 억세게 좋았을 뿐이다.

테루아나 빈티지는 인간의 노력으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게 아니듯 이들 구세대 남성들이 여성에 대해 지닌 편견과 폭력성에도 근본 해결책이 없다. ‘올드 빈티지’(old vintage)인 이들이 모두 떠나고 ‘영 빈티지’(young vintage)인 신세대로 교체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미투 운동의 미래는 그래서 당장은 비관적이다,

테루아와 빈티지는 와인뿐 아니라 기업경영에도 결정적이다. 기업가 정신이나 창의성 같은 인간의 노력보다는 기업을 둘러싼 환경과 토양, 예를 들면 정치권과 행정부 사법부 등의 기업에 대한 태도, 사회적 여론 등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 기업들을 둘러싼 테루아와 빈티지는 최악이다.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이 고등법원 판결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아 이번 국정농단 재판에서 기업인들은 피해자로 정리되는 듯했는데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예상치 못한 법정구속으로 이 구도가 다시 뒤집어지고 말았다.

특히 롯데그룹은 신동빈·신동주 회장 간 경영권 분쟁이 재개돼 경영권 향방이 안갯속으로 빠져들었다. 또 앞으로 있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대법원 재판도 낙관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올드 빈티지’인 이명박·박근혜정권이 물러나고 ‘영 빈티지’의 문재인정부가 들어섰지만 적어도 기업들의 경영환경 측면에선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다. 기업경영에 힘이 되는 ‘빈티지 좋은’ 정권은 언제나 들어설까. 우리는 또 한 번 더없이 좋은 기회를 날려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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