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번째 세계

머니투데이 이영인 (필명)  | 2017.01.02 06:57

[1회 과학문학공모전 단편소설] 가작 '네번째 세계' <11> 확장

삽화=디자이너 임종철

AT. 59

곤살로와 스티브가 새로운 키워드, 반엔트로피나 무한동력 등을 이용해 번역 프로그램을 업데이트하였다. 결과는 대단히 긍정적이다. 번역 속도가 놀랍도록 향상되었다.

우리에게는 반균질화 가설을 검증할 어떠한 방법도 없지만, 시아에서 같은 논리나 이론을 찾아낼 수는 있을 것이다. 시아 안에 반균질화 가설과 비슷한 내용이 들어있다면 그것만큼 정확한 검증도 없을테지. 게다가 번역 속도의 향상은 우리의 반균질화 가설을 지지해준다는 반증이다. 이 말도 안되는 이론을 이런 방법으로 검증할 수 있을 줄이야...


맙소사, 한 가지가 더 설명된다. 방금 스타니슬라프가 놀라운 이야기를 꺼냈다.
바로 시아의 제작자와 우리가 왜 그렇게 비슷하면서도 다른 문명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먼저 나는 '살덩이'들의 증식을 너무 우습게 생각했다. 스타니슬라프가 이 점을 지적했다. 엔트로피가 역전되었을 경우(아직도 이런 가정은 생소하다) 이런 살덩이는 무한정 증식할 수도 있다. 어쩌면 증식 속도에 따라서 우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증식 속도는 블랙 필드 밖을 봐야 알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증식 속도가 어마어마하다면 실로 정신나간 이야기가 가능해진다. 예를 들자면 살덩이들이 태양계 전체를 집어삼키는 것따위를 말이지.

이곳에서 지구까리의 거리는 약 40억km다. 어마어마한 거리이다. 그런데 시간도 19억년이라 마찬가지로 어마어마하다. 대충 1년에 2km만 전진해도 지구까지 도달할 수 있다. 1년에 2km,하루에 5m, 1시간에 20cm정도 성장한다면 살덩이들이 우주공간에서 번식해 지구까지 기어간다는, 정신나간 소리가 가능하다.
이 살덩이 무리가 지구까지 완전히 도달할 필요도 없다. 어느 정도까지만 가더라도 우주에 가득 차버린 살덩이들은 시간과 엔트로피가 정상으로 돌아오자마자 중력과 여러 힘에 의해서 쪼개지고 우주 전체로 퍼질 것이다. 물론 대부분이 바로 죽겠지만, 만약 그 중 몇 개라도 온전하게 지구에 떨어진다면?

19억년 전의 지구 상태에 대해 찾아보았다. 박테리아 같은 최초의 생물은 35억년 전에 생겨났지만, 수억년동안 산소를 사용하는 생물, 그러니까 보다 복잡한 생물은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가 그렇게 고생물이라 생각하는 공룡이 2억년정도 전에 나타났다.
산소를 사용하는 생물, 진핵생물, 다세포생물, 한마디로 좀 더 복잡하게 발전된 생물은, 17억년전에서 19억년 전에 발생했다.

실로 공교로운 숫자가 아닐 수 없다. 시아는 처음과 두 번째에 18억년 전으로, 그리고 이번에는 19억년 전으로 돌아갔다.

만약 지금 우리로부터 발생한 살덩이가 그런 원시 지구에 떨어지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 살덩이가 아무리 기형적이고 불완전하게 보여도, 18~19억년전의 원시 지구라면 가장 복잡한 구조물을 가진 고등생물이 되어버린다. 그 안에는 당시에는 존재하지도 않던 발전된 세포소기관과 생체구조물이 들어있다. 곤살로의 추론에 의하면 이것들이 바로 죽어서 시체만 남는다 해도 원시 생태계가 통째로 바뀔 수 있다고 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지 한참 근거를 뒤져보았다.
원시 생태계는 매우 단조로운 상태이다. 어느 정도 복잡한 구조를 가진, 동식물같은 것들은 존재하지도 않고 바이러스나 세균같은 원시적인 생명체들만 있는데, 이들 조차도 우리가 현재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단조롭다. 이제 막 세포분열을 마친 배아보다도 유약하고, 외부 환경에 취약한 수준으로 볼법하다.

그리고 포유류같이 복잡한 생물구조라면 상상도 할 수 없겠지만, 세포 수준에서는 생물체 간의 융합이나 흡수가 빈번히 일어난다. 바이러스도 다른 생물과 융합하는 사례라 볼 수 있고, 그밖에 여러 가지 사례를 찾았지만 여기에 가장 적합한 것이 바로 미토콘드리아다.
미토콘드리아는 우리 몸에 있는 세포의 구성물질 중 하나이다. 세포 호흡, 다시말해 영양분을 에너지로 바꾸는 역할을 하는, 세포에서 엔진의 역할을 하는 놈이다. 그런데 이 미토콘드리아는 자신만의 DNA를 가지고 있고, 다른 구성물질들은 세포가 직접 만들어내는데 미토콘드리아는 자기 자신이 독립적으로 분열한다. 세포 안에 들어는 있지만 완전히 다른 생물이 공생하는 모양새인 셈이지. 그래서 원래는 미토콘드리아가 세포의 구성물질이 아니라 독립된 하나의 생물이었다가, 하나의 세포로 융합된 것이라는 가설이 있다.
그러니까 아주 먼 옛날에는 미토콘드리아와 원시세포 이 두 종류의 생명체가 따로따로 있었는데, 이 둘이 어떤 원인으로 융합하여 공생관계가 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아예 합쳐져 하나가 되어버렸다.
이런 사례가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다. 다른 예시로 파울리넬라(Paulinella)라는 속(屬)의 아메바가 있는데, 이 아메바는 미토콘드리아 대신 광합성을 하는 박테리아를 흡수했다. 그래서 이 아메바는 체내의 박테리아를 통해 광합성을 하며, 세포-미토콘드리아와 비슷한 방식으로 공생한다.

자, 상상해보자. 우리로부터 유래된 살덩이가 어찌어찌해서 지구로 떨어졌고, 세포 안의 구조물이 원시 지구의 세포들과 융합할 가능성이 있는가? 아니, 그 살덩이 안에 미토콘드리아가 직접적으로 있을 수도 있지. 여하튼 복잡한 살덩이의 세포와 원시 지구의 단순한 세포가 융합할 가능성이 있는가?
우리 생각에는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그렇다. 저 살덩이가 지구에 떨어진다면, 원시 생태계는 커다란 교란이 발생할 것이다.

게다가 또 하나 기가 막힌 부분이, 세포가 미토콘드리아와 융합하고 나서야 비로소 진핵생물이 등장하고, 세포의 에너지 효율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생물진화에 박차가 가해졌다. 그 시기가 바로 15억~19억년 전이다. 이번 시간이동에서도, 저번의 시간이동에서도 시아는 바로 그 시기로 되돌아갔다.

어쩌면 과거에도 비슷한 세포간 융합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번이 처음이 아닐지도 모르지. 이전에도 미래에서 과거로의 이동때문에 변수가 발생한 것일지도 모른다. 원시 지구생태계에는 혁명에 가까운 변수가. 이로 인해 나비효과가 발생했을 테고, 이 사건으로 인해 지구상의 생물종이 현저히 달라질 수 있는가? 당연하다. 20억 년의 시간이 있다. 초기 변수가 달라진다면, 20억년의 시간이 흘러 완벽하게 다른 생명체가 탄생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소리다.

시아의 연표를 미루어보자면 그런 일이 한 번만 일어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자, 이제 큰 그림이 그려진다. 우리가 지구상에 있었던 첫 번째 문명이 아니었다고 가정해보자. 시아를 만든 문명은 똑같이 지구에 살았지만 우리와 완전히 다른 종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시아가 과거로 오면서 어떠한 영향을 미쳤고 그 때문에 역사가 상당히 달라져서, 이 때문에 새로운 문명이 발생했다. 그 후에 우리가 탄생한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그들과 우리의 언어 체계가 그토록 달랐는지, 그러나 왜 우리가 유사한 인터페이스를 가지는지가 설명된다.
그들은 우주가 리셋되기 전의 지구 출신 지적생명체, 다시 말해 첫 번째 '지구인'이었던 것이다! 환경이 유사하니 신체 구조도 닮았을 테고, 인터페이스도 마찬가지였겠지. 그러나 완전히 같을 수는 없을테니 복잡한 발명품인 언어구조는 상당한 차이가 났겠지. 마치 유럽대륙의 언어와 아메리카대륙의 언어가 전혀 달랐던 것처럼.

사실일지 아닐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너무나도 절묘한 발상이다.
이 가설에 따르면 지구는, 그리고 우주는 시아에 의해 두 번의 리셋을 경험한 것이고 우리는 세 번째 세상의 지구인일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상당수의 의문이 해결되어 버린다. 내 머릿속에서 이리 튀고 저리 튀면서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던, 도저히 한 데 묶일 것 같지 않던 의문들이 모두 하나의 답으로 귀결된다.
물론 아직 해결되지 않는 것들도 많다. 시아가 왜 이토록 지구에서 먼 곳에 외따로 있었냐 하는 것 따위가 그렇다. 어쩌면 이 수수께끼가 풀리고 새로운 사실이 나타나면 우리 가설은 한순간에 쓰레기통에 쳐박혀야 할지도 모른다. 뭐, 가설이 그렇게 되버리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다.

그러나 반균질화 가설은 이제는 우리 사이에서는 희망이 되어 버렸다.
살아생전 진지하게 열역학 법칙에 반기를 들고 지구 생명체의 리셋같은 이야기를 하게 될 줄이야.

너무 소설을 쓰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렇게 외진 곳에 갇혀서, 이곳에 있는 증거만으로 95억년을 통한 세 번의 지구 리셋과 세 개의 서로 다른 문명까지 유추할 수 있다니.
그러나 이야기가 너무 기가 막히다. 이것이야말로 사람의 강점일 테지. 아니, 논리의 강점이려나. 아직까지 소설에 불과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논리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이제 검증을 통해 경악할만한 사실인지, 아니면 그저 소설일 뿐인지 확인하면 되는 일이다.




AT. 60


어제에 이어서 끊임없이 토론하는 중이다. 오늘은 우리가 마음의 준비를 하던 사실에 종지부를 찍었다.

우리는 우리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

우리가 알던 세계는 우리가 과거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오염’되었다. 지난번의 시간이동으로 문명이 바뀌었다면, 이번의 시간이동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부터 곧장 19억년 후의 미래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 세계는 우리의 고향과는 다른 모습일 것이다. 설령 시아가 영구기관이라 하더라도 옛날 그대로의 우리 세계를 되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가족에게, 나의 진정한 안식처에 갈 수 있는 방법은 더 이상 없다.

언제나 마음의 준비를 해 왔지만 솔직히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커다란 비극이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내게는 인류의 역사가 사라졌고, 그 수많은 기쁨과 성취, 그리고 업적들과 수많은 사람들이 사라져 버린 것보다, 더 이상 가족을 볼 수 없다는 것이 미치도록 서글프게 만든다. 내가 직접 겪었던 나만의 것들은 모두 사라졌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이 부분은 어떻게 할 수 없겠지.




AT. 61

시아의 번역속도가 놀랍도록 향상되었다. 스티브의 말에 의하면 지금같은 속도라면 한달 정도면 시아 안의 모든 데이터가 초벌 번역이 완료되며, 두세 달 정도면 시아를 우리 뜻대로 작동할 수 있지 않을까 추정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살아날 수 있다. 맙소사, 이 무덤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
우리가 움직이지 못했던 것은 블랙필드를 어찌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함선은 망가졌고, 아마 블랙필드를 해제하면 밖에 있던 어마어마한 살덩이들이 쏟아져 들어오겠지. 식량도 제한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안전한 곳은 40억km 밖에 있다. 도저히 방법이 없어 보였다.

사실 애저녁에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냥 뭐 때문에 죽는 것인지라도 이해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될 줄이야.

이제 우리에게는 무한동력으로 추정되는 괴물이 있다. 정말 무한동력일지는 살펴봐야 하겠지만, 최소한 100억년을 멀쩡히 움직이는 괴물이다. 게다가 이 놈은 시간 이동을 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시공간 이동이다. 즉, 시아를 적절히 사용하기만 하면 공간 이동도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블랙 필드의 위력을 미루어보아 외부에서 오는 대부분의 물리적 충격을 차단해 줄 것이다. 장거리 항해가 가능하다 확신을 할 수는 없겠지만, 반균질화 가설을 토대로 한 이론으로는 충분히 가능하리라 예상된다. 시아를 제대로 다룰수만 있다면 우리가 가진 모든 취약점을 상쇄할 수 있다. 정말로 무한 동력이라면 가능할 것이다.
지구로 돌아갈 수도 있겠지. 그리고 그럴 것이다.

결국 이 녀석들과, 이 난관을 헤쳐나가게 되는 것인가. 살아서 나갈 수 있다는 이야기인가. 심정이 대단히 복잡하다.
시아의 시간여행이 왜 작동되었는지 아직 확인하지 못했고, 해결하지 못한 문제는 너무도 많다.
우리 가설이 맞다면 지금의 지구는 역사도 없고, 인류도 없으며, 동식물도 없다. 돌아가게 된다면 지구를 '테라포밍'해야 한다. 얼마나 아이러니한 말인가. 원시 지구를 개척한다는 것은 상상해본 적도 없는 일이다.
우리가 새로운 생명의 시초가 되는 것인가? 감히 그런 일을 할 주제가 될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장비들도 대부분 고장난 상태인데 가서 집이라도 지을 수 있을 지 모르겠다. 지구는 화석연료는커녕 아직 나무도 풀도 없는 상태일텐데. 뭘 가지고 개척을 해야 하는가? 농사같은 것을 할 수는 있으려나?
그냥 가자마자 다 죽는 것은 아닐런지. 아니면 시아가 진짜 영구기관은 아니라서 지구로 이동하다 고장나면, 우주 공간에서 그대로 죽을 수도 있겠지.

따져보면 굳이 갈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고향도 없고,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다. 그렇다. 우리가 사랑하던 것들이 사라져 있을 것이다.
내가 평생을 아끼던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그런 곳에 간다고 치면, 그리고 나서는 뭘 해야하지 하는 의문도 든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모든 것들을 감안하더라도 돌아가고 싶다. 대지에 서서 태양을 바라보고 싶다. 죽더라도 지구 위에서 뼈를 묻고 싶다.
나로서도 잘 이해가 가지는 않는다. 딱히 갈 필요가 없어 보인다다. 그럼에도 가고 싶다.
심정이 정말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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