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雜s]'후자(後者)의 저주'가 더 무섭다

머니투데이 김준형 부국장 | 2016.01.05 08:51

전임자의 흔적 지우려는 후임자, 사회 퇴보의 주범

편집자주 | 40대 남자가 늘어놓는 잡스런 이야기, 이 나이에도 여전히 나도 잡스가 될 수 있다는 꿈을 버리지 못하는 40대의 다이어리입니다. 몇년 있으면 50雜s로 바뀝니다. 계속 쓸 수 있다면...
올해도 새해 신문의 인사란을 새 이름들이 빼곡히 채웠다.
인사란은 원래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 어디로 갔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옆 칸을 훑어봐서 이름이 보이지 않으면 '아…' 하고 짧은 한숨을 내쉬게 된다.

때론 스스로 "새 삶을 시작하게 됐다"고 연락을 해오는 분들도 있다. "축하 드린다"고 말하긴 하지만 그 분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는 모른다(물론 ‘퇴임’ 을 자진 신고하는 분들은 대개는 '다음' 계획이 있거나, 이제는 정말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싶은 의사와 능력이 있을 것이다).
다른 자리로 옮기게 된 분들에게는 ‘축, 영전' 메시지를 보내지만, 실은 그게 영전인지 뭔지 애매한 경우가 많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붙들고 있는 건 분명 축하할만 한 일이다).

퇴임이건 영전이건, 짧은 축하 뒤의 관심은 ‘다음 사람’에게로 넘어간다.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라는 인삿말 뒤에 곧바로 따라 붙는 "후임은 누구시죠?"라는 말이 조금은 야속할 수도 있지만, 그게 세상살이다.
특히 기업 하는 사람들 입장에선 '거래' 상대('갑'에 해당하는 자리일수록) 후임자가 누구냐가 비즈니스에 절대적인 변수가 될 수 있다.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조어 중에 '승자의 저주'라는 말이 있지만, 일상 비즈니스에서 더 무서운 건 '후자의 저주'이다. 후임자는 전임자의 성과를 무조건 부인하고 흔적을 지우려 든다.
승자의 저주는 이기고도 지나친 출혈 때문에 무너지는 자멸 현상이다. 반면 후자의 저주는 혼자 망하는데 그치지 않고 조직과 사회가 이룩한 성과를 통째로 퇴보시킨다는 점에서 심각성이 더하다.


외국기업의 투자를 유치해 지방자치단체와 사업 양해각서(MOU)를 맺었던 한 기업인은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새 지자체장이 사업을 전면 보류시키면서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고 하소연했다. 잘 되면 전임자 업적이고, 잘못되면 책임 뒤집어쓰는걸 왜 내가 하느냐는 표정이 후임자에게 역력했다. 실무자도 모르쇠로 돌변했다. 괜히 발 벗고 나섰다간 '이전 단체장 사람'이라고 찍히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후자의 저주'는 대한민국 행정 조직의 유구한 전통이 돼 가고 있다. 이전 정부에서 대한민국의 신성장동력이라던 '녹색성장'은 좀처럼 만나기 힘든 희귀어가 됐다. '고졸 채용'으로 들어왔던 젊은이들은 눈칫밥을 먹고 있다. 이 정부 임기가 끝나는 2년 뒤 미래창조과학부, 창조경제혁신센터 같은 게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공무원이 몇 명이나 될까. 별 울림이 없긴 했지만 어쨌든 '하이 서울(Hi Seoul)'이라는 말이 겨우 귀에 익나 싶었더니 어김없이 퇴출되고, 'I.SEOUL.U'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새로 온 '후자'들은 그 뒤에 올 또 다른 '후자'의 저주'를 예견하고 있는 터라 마음이 급하다. 최대한 대못을 박아 놔야 하기 때문에 정책은 거의 예외없이 '임기내'에 맞춰진다.

공무원사회나 공기업만 그런가. 사기업 민간 금융기관도 새 최고경영자(CEO)가 오면 이전의 흔적을 지우고 자기 업적 쌓기에 몰두한다. 이전 CEO가 만들었던 사업이나 부서, 상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 그러다보니 '후자의 저주'는 외부와의 관계에서 뿐 아니라 내부 업무 연속성과 효율성에도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친다.

전임자의 과오를 찾아내고, 묵은 때를 씻어 내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 후자의 저주는 도가 지나치다.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신년 공동 인터뷰에서 새 경제팀에 바라는 걸 묻자 "기존 정책을 차질없이 추진하는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말한 것도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사회 선진화의 척도는 '후자의 저주'가 얼마나 최소화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해 새 자리를 맡으신 분들, 앞으로 새 자리를 꿈꾸는 분들께 드리고 싶은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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