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과학] 부재(不在)는 그 자체로 실체다

머니투데이 김상욱 부산대 물리교육학과 교수 | 2015.11.13 03:00

<9>때로 침묵은 금이 아니라 독이다

고려대생이 "우리에게는 김연아가 있다"고 자랑했다. 그러자 연세대생이 대답했다. "우리에게는 MB가 없다."

우스개지만, 때론 부재(不在)가 존재만큼이나 중요할 때가 있다.

이 세상이 무언가로 빈틈없이 가득 차 있다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 주위는 공기로 가득하다. 그래서 우리는 공기를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공기가 없는 곳에 가면 바로 공기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 물속에 사는 물고기는 물의 존재를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물속에 생긴 거품을 보면 거품이라는 존재가 생겨났다고 생각한다. 거품 안에는 공기가 있지만, 공기 자체는 원래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거품 속 공기와 물의 경계, 즉 물의 부재다. 물의 부재로 만들어진 거품은 이제 그 자체로 존재가 되어 마치 실재인 듯 물속을 움직여 다닌다.

193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폴 디랙은 이 세상이 전자로 가득 차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진공은 텅 빈 것이 아니라 전자로 꽉 찬 것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세상이 무엇인가로 가득하다면 그것은 오히려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당시에는 '혼이 비정상'이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디랙은 사람들의 조롱에도 굴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진공에 충분한 에너지를 주면 전자가 튕겨 나갈 것이고, 그 빈자리가 마치 물속의 거품처럼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이 거품에 '양전자'라는 이름을 준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전자와 양전자라는 두 개의 입자가 생길 수 있다는 뜻이다. 이쯤 되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니,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랄까. 양전자와 같은 부재의 입자를 '반입자'라고 한다. 1932년 칼 데이비드 앤더슨이 우주선(宇宙線)에서 디랙이 말한 바로 그 양전자를 발견한다. 디랙이 옳았던 것이다. 앤더슨은 이 업적으로 1936년 노벨물리학상을 받는다.

이런 이야기가 흥미롭기는 하지만, 일상생활과 상관없는 학문적 관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스마트폰이나 컴퓨터에는 디랙이 말한 반입자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컴퓨터가 수행하는 모든 행동은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다. "더하라. 지워라. 1을 써라." 등등.


이런 모든 문장은 알파벳이나 기호로 나타낼 수 있다. 알파벳이나 기호는 숫자에 대응시킬 수 있고, 모든 숫자는 이진법으로 표현가능하다. 즉, 컴퓨터가 하는 모든 행동은 0과 1의 나열로 나타낼 수 있다. 실제 전자소자에서는 전류가 흐르면 1, 흐르지 않으면 0이다. 결국 모든 전자소자는 기본적으로 반도체 내에서 전류의 흐름을 제어하여 작동하게 된다.

전류란 전자가 이동하는 것이다. 반도체 내부는 전자로 가득 차있다. 여기에 여분의 전자가 생기면 전자가 움직인다. 하지만 전자를 약간 없애도 전류가 흐를 수 있다. 이때는 '정공'이라 불리는 전자의 부재가 전류를 만든다. 전자가 흐르는 반도체를 n형 반도체, 전자의 부재가 흐르는 반도체를 p형 반도체라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전자기기는 바로 이 n형, p형 반도체를 이어붙인 접합구조에 기반을 두고 있다.

부재는 그 자체로 실체다. 어둠은 단지 빛이 부재한 것이다. 불의(不義)는 단지 의(義)가 없는 것이다. 잘못된 일을 보고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지 적극적인 의가 없는 상태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렇게 생겨난 의의 부재는 실체가 되어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그들이 처음 공산주의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유대인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내게 왔을 때, 그때는 더 이상 나를 위해 말해 줄 이가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20세기 초 독일의 나치정권하에서 침묵했던 지식인들을 비판하는 시다. 나치의 만행을 히틀러의 책임이라고 하고 싶겠지만, 사실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요즘 우리 사회가 잘못 되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잘못된 사회에서 비판과 행동의 부재는 그 자체로 독재와 억압이라는 실체가 된다. 때로 침묵은 금이 아니라 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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