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한 바퀴'가 일깨워 주는 소박한 삶의 진리

머니투데이 이현주(칼럼니스트) ize 기자 2024.05.02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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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토요일 저녁 방송인 이만기가 선사하는 힐링 타임

사진='동네 한바퀴' 방송 영상 캡처사진='동네 한바퀴' 방송 영상 캡처


언제부턴가 소소하게 재미를 붙인 일이 있다. 취미라고 하기엔 어쩐지 거창한 것 같고, 습관이라고 하자니 거르는 경우도 많아 적절치 않지만 틈날 때마다 즐겨하는 일이긴 하다. 바로 동네 산책이다.

시작은 점심시간 햇볕 쬐기부터였다. 집에서 싸 온 간단한 음식으로 점심을 해결하다 보니 어쩔 땐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바깥 공기를 제대로 쐬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그래서 식후 잠깐이라도 걸어보자 마음먹고 사무실 근처를 어슬렁거리기 시작한 것.



그날그날 발길 닿는 대로 동네를 도는 건 생각보다 재미있다. 새로 문 연 가게를 비롯, 한 번쯤 들어가 보고 싶은 곳을 매일 발견한다. 운 좋게 근처에 공원이 있어 요즘은 공원을 자주 드나든다. 봄이 되어 피어난 꽃들과 하루가 다르게 초록이 짙어지는 나무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해서다.

이런 재미를 알기에 KBS1 ‘동네 한 바퀴’를 즐겨본다. 발품 없이 동네지기 이만기를 따라 전국의 동네를 구경할 수 있으니 마다할 이유가 있겠는가. 2018년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동네 한 바퀴’는 제목 그대로 동네를 돌며 그곳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잔잔히 그려왔다.



사진='동네 한바퀴' 방송 영상 캡처사진='동네 한바퀴' 방송 영상 캡처
동네지기는 차를 타지 않고 걸으며 동네를 훑는다(때로 그 범위가 도보 가능 거리를 훌쩍 넘긴 하지만 애교로 봐주자). 속도가 중요한 시대에 굳이 걷는다는 건 빠르게 지나치면 볼 수 없는 중요한 장면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지역의 명소를 찾기보다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를 찾아 천천히 걷다 사람들을 만나고, 자연스럽게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살아온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모든 일은 멀리서 보고 지나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모두 의미 깊고 특별하기 마련이다. 간판이 없어 무심코 지나칠 수 있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엄마가 해주는 집밥처럼 따뜻한 밥상을 내어주는 식당이 있는가 하면, 세탁소인 줄 알고 들어선 곳이 알고보면 카페인 것처럼. ‘동네 한 바퀴’는 그렇게 세상은 관심 가지는 사람에게만 속내를 드러내고 그럼으로써 풍부한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소박한 진리를 새삼 일깨워 준다.


‘동네 한 바퀴’가 주목하는 사람들은 주로 오래도록 그 지역을 지키며 살아온 토박이나 새롭게 정착한 젊은이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우직하게 자기의 일을 열심히 하며 자신만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다. 저마다 모습이 다르고 사연도 다르지만 한결같은 것이 있다. 삶이 늘 화창했던 것이 아니고 궂은날도 많았다는 것. 그럼에도 지켜내야 할 가족이 있어 버텨왔고, 고된 날을 견뎌냈기에 결국은 행복을 이야기할 수 있는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 삶은 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야 하는 것이고 그렇게 살고 있는 이들이 아름답다는 것.

사실 그건 지극히 상투적이고 공영방송 교양 프로그램으로서 전달해야 하는 전형적인 메시지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계속 보게 되는 이유는 ‘동네 한 바퀴’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그들’이 아닌 바로 ‘내’ 이야기 같기 때문일 것이다. 동네는 달라도 사람 사는 건 별다를 것 없다고, 그들처럼 나도, 열심히 일상을 일궈가면 언젠가 좋은 날이 올 것이라 위안받고 싶어서일 것이다. 그건 결국 평범한 우리가 가장 보고 싶은 장면이자 제일 듣고 싶은 이야기일지 모른다. ‘동네 한 바퀴’는 화려하고 극적인 볼거리를 주는 드라마와는 다른, 나를 주인공으로 한 인간 극장 같은 진솔한 재미를 준다는 점에서 존재 이유가 충분하다.

사진='동네 한바퀴' 방송 영상 캡처사진='동네 한바퀴' 방송 영상 캡처
주중 점심시간이 사무실 동네 산책 시간이라면 주말엔 집 동네를 산책한다. 집 동네 산책에 더 큰 애착이 가는 이유는 당연하다. 더욱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줄곳 한 동네서 산 나에겐 동네 구석구석에서 마주치는 것들이 곧 내 역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므로.

최근 ‘동네 한 바퀴’에 반가운 곳이 나왔다. 우리 동네 라면집이 방송을 탄 것이다. 늘 지나치지만 가본 적은 없는 라면집을 지키는 주인장은 머리가 하얀 할머니셨다. 87세의 연세에도 목소리가 짱짱하신 할머니. 사연을 몰랐을 때 무심코 지나쳤던 그 집은 앞으로는 내게 특별한 라면집으로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으로 기억될 것이다.

속담에 ‘동네 의원 용한 줄 모른다’는 말이 있다. 가까운 곳의 장점을 모른다는 의미다. 소중한 것은 사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데 자꾸 우리는 그걸 까먹는다. 이번 주말에는 또 우리 동네에 무슨 보물이 있는지, 어슬렁거리며 찾아나서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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