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의 4년차 한 외국인 직원은 12일 임원인사와 맞물려 연공서열 파괴와 능력 우대에 초점을 맞춘 인사제도 개편과 임원 인사가 이어지는 데 대해 이렇게 촌평했다. 최근 삼성전자를 비롯해 국내 주요 기업에 불어닥친 조직문화 개편 바람의 정곡을 찌르는 한마디다.
이경묵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질문하는 조직'이 가장 중요한 생존전략이라는 것을 기업들이 깨닫기 시작한 것"이라며 "정체 위기에 놓인 기업 문화 전반에 변화를 주는 작업에 좀더 속도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직급 체계를 단순화하고 수평적 조직 문화 조성에 힘쓰는 것은 삼성만이 아니다. 현대차·SK·LG 등이 사원·대리·과장·차장·부장으로 이어지는 반세기의 직급 체계를 2~3단계로 축소했다. 직원간 호칭을 '매니저'나 '님', '프로'로 통일한 곳도 있다. 보수적인 은행권도 이런 분위기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하나금융그룹은 지난해부터 직급 호칭 없이 '영어 별칭'을 부른다. 올초 대기업과 IT업계를 휩쓴 성과급 불만 사태 이후 성과보상체계와 인사제도 개편에 속도를 내는 기업도 상당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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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떠밀린 면이 있지만 직무와 능력, 성과 중심의 인사제도 개편은 글로벌 시장 생존 전략에서 불가피한 변화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과거 '관리의 삼성'으로 통했던 삼성 특유의 '일사불란'은 패스트팔로어 시대의 국내 기업에 모범 교본과도 같았다. 짧은 기간에 선두주자를 추격하고 결국 넘어서는 데 톱다운식 효율성은 강력한 무기였다. 문제는 국내 기업들이 패스트팔로어에서 퍼스트무버로 올라서면서 시작됐다.
이경묵 교수는 "더는 모방할 것이 없는 국내 기업들은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들어 시장을 개척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임직원들의 다양하고 창의적인 능력을 활용하는 것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절반의 성공으로 남았지만 삼성전자가 2016년 직급을 7단계에서 4단계를 축소하는 조직 수술을 단행했던 배경에도 '알파고 충격'이 있었다. 그 해 3월 구글의 인공지능 '알파고'가 이세돌 9단과 바둑 대결에서 5전 4승 1패로 승리하자 더이상 '관리의 삼성'으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삼성을 휩쓸었다. 권위적인 일사불란이 아니라 다양성과 창의성이 중요하다는 진단은 곧바로 수평적 인사제도 개편 시도로 이어졌다.
구글·애플 벤치마킹…"인재에 국경 없다"
5대 그룹 인사팀 한 인사는 "요즘 기업 인사담당 부서의 최우선 과제는 젊은 인재들에게 우리 회사가 '기회의 땅'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실리콘밸리식 인재 확보전은 사실 핀테크·게임·포탈 등 IT업계와 스타트업에서 먼저 수용했다. 핀테크업체 토스는 지난해 유튜브에 올린 채용 동영상에서 "직급은 없고 역할은 많다", "누구한테 보고하느냐고 물을 필요도 없다"는 인터뷰로 화제를 모았다. 국내 최대 포탈 네이버는 지난달 만 40세의 최수연 대표를 새 수장으로 뽑아 파란을 일으켰다.
삼성전자는 2018년 대기업 특유의 경직된 조직 문화에 스타트업의 이런 수평적 조직문화를 이식하겠다며 토스·야놀자·우아한형제들 등 국내 주요 스타트업과 워크숍을 진행했다. 한때 세계 최대 IT업체였던 마이크로소프트가 2010년 들어 구글과 애플에 밀리기 시작하자 십수년을 지켜온 상대평가식 성과보상체계를 접고 협업과 토론에 초점을 맞춘 구글과 애플의 기업 문화 배우기에 공을 들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최근 재계의 변화는 전통 제조업에서 IT, 전기차 등을 중심으로 산업계 지각변동이 진행되는 흐름과 맞물려 삼성·현대차·LG·한화 등에서 새로운 기술의 등장과 세계화의 변화 속에 성장한 젊은 오너 경영인이 전면에 부상하는 추세와도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이은형 국민대 경영학부 교수는 "총수의 세대가 바뀌었다는 것은 기업 전반에 걸쳐 큰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며 "기존 인재들과 새로운 세대의 인재 사이에서 기업을 혁신으로 이끄는 과정에서 총수들이 소통의 가교 역할을 해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