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韓 급소 노렸다"…삼성 반도체 임원회의서 나온 장탄식

머니투데이 심재현 기자, 최석환 기자 2019.07.01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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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수출규제 발표, 8월 생산차질 우려…소재·장비 취약한 반쪽짜리 IT강국 민낯 드러나

"日, 韓 급소 노렸다"…삼성 반도체 임원회의서 나온 장탄식


"그래도 설마 했는데 올 것이 왔다."

1일 일본 정부가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를 발표하자 삼성전자 화성사업장에 모였던 임원들 사이에서 씁쓸한 탄식이 이어졌다고 한다. '일본산이 아니면 안 되는' 소재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이들이 뱉어낸 착찹한 한마디다.

이와 관련, 한 업계 관계자는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됐는지를 떠나 당장 생산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비상사태"라며 "사태가 진행 중이기 때문에 더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반도체·디스플레이 업계가 일본의 수출규제 발표로 충격에 빠졌다. 설마 했던 일이 현실이 되자 업계에선 "일본이 한국의 급소를 노렸다"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정부도 업계 관계자들과 긴급회의를 열면서 공동대책 강구에 나섰다.

◇ 일본 외 대체공급처 마땅찮아…업계 '초비상' = 업계 관계자들은 양국 정부간 외교문제와 국민감정 등이 얽힌 이번 사태의 파장이 확산되는 것을 우려하는 듯 애써 침착하게 대응하면서도 사태 파악과 향후 대책 마련, 고객사 대응 논의 등으로 분주한 하루를 보냈다. 구매담당 부서뿐 아니라 상품전략·기획, 마케팅 등 사실상 모든 조직이 대응에 나선 상태다.



일본 정부가 수출 규제를 시행하는 품목은 TV와 스마트폰 디스플레이 패널의 핵심 재료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와 반도체 제조과정에서 필요한 리지스트, 에칭가스(고순도불화수소) 등 3개 품목이다. 에칭가스는 반도체 제조공정에서 회로 모양대로 깎아내는 데 필요한 소재이고 리지스트는 반도체 원판 위에 회로를 인쇄할 때 쓰이는 감광재다.

엄밀하게 말하면 일본 정부의 이번 조치로 이들 3개 소재가 한국으로 전면 수출금지되는 것은 아니다. 일본 정부의 방침은 수출절차를 간소화하는 등 그동안 한국에 대해 취했던 우대조치를 취소하고 오는 4일부터 절차를 강화해 계약을 맺을 때마다 허가·심사를 거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수출 허가권을 쥔 일본 경제산업성이 전적으로 재량권을 쥔 상황이다.

업계가 긴장하는 것은 3개 품목이 반도체·디스플레이 제조에 필수적인 소재인 데다 일본업체가 세계 시장의 70~90%를 점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 (77,600원 ▼2,000 -2.51%)와 삼성디스플레이, SK하이닉스 (173,300원 ▼9,000 -4.94%), LG디스플레이 (9,930원 ▼120 -1.19%) 등이 모두 거의 전적으로 일본업체의 공급에 의존한다.


업계 관계자는 "일본 물량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을 경우 다른 업체에서 물량을 충당하더라도 생산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며 "일단 물량에서부터 일본에서 받는 공급량이 절대적인 상황"이라고 전했다. 일본 정부가 한국 경제의 대들보인 반도체·디스플레이 산업을 콕 찍어 보복수단을 들고 나왔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삼성전자 반도체 생산라인. /사진제공=삼성전자삼성전자 반도체 생산라인. /사진제공=삼성전자
◇ 이르면 8월부터 품질·수율 차질 우려…애플도 걱정
= 또 다른 문제는 일본에서 생산하는 3개 소재의 품질 역시 절대적이라는 점이다. D램이나 낸드플래시,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등에서 한국산을 최고로 치듯 이들 제품을 만들어내는 소재 단계에선 일본산이 최고로 통한다.

반도체산업협회 관계자는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LG디스플레이처럼 업계에서도 첨단제품을 만드는 선두업체의 경우 일본산 소재 공급에 문제가 생길 경우 품질이나 수율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일본의 수출규제 발표 이후 애플이나 아마존 등 고객사에서도 관련 문의가 이어지면서 삼성전자 등이 대응에 나선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일본이 수출규제에 돌입할 경우 수출 허가 신청과 심사에는 90일 정도가 걸릴 전망이다. 국내 반도체·디스플레이 업계가 확보한 비축량은 소재별로 대략 한달, 최대 3개월 분량으로 알려진다. 한가지 소재라도 부족할 땐 전체 생산공정이 멈출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일본 정부가 심사를 차일피일 미룰 경우 당장 8월부터 타격이 가시화할 수 있는 셈이다.

업계 관계자는 "일본 정부의 허가에 90일 정도가 걸린다는 것도 예상 시나리오 중 하나일 뿐 앞으로의 상황에 따라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며 "올 1월 수출 규제 가능성이 불거졌을 때도 다들 '설마'라고 했지만 반년만에 이런 상황이 됐지 않냐"고 말했다.

◇ 반쪽짜리 반도체 강국 민낯 드러나…자성론도 = 업계에선 이번 사태를 자초했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나온다. 한 기업 고위 관계자는 "올해 초부터 일본 정부의 수출규제 조짐이 감지됐고 이보다 앞서 몇 년 전부터 핵심 소재 공급처를 다변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대부분 무관심했던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한 반도체 업체 인사는 "한국이 반도체·디스플레이 강국이라고 하지만 완성품 단계에서나 시장 선두일 뿐 소재나 장비 단계에서는 세계시장에서 명함도 내밀지 못할 정도로 뒤떨어진 수준"이라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려면 전·후방 산업이 어느 정도는 뒷받침돼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일각에선 일본 정부가 보도된 대로 수출 규제를 전면적으로 실행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전면적인 수출 제한보다는 절차적인 측면에서 불편함을 주는 선에 그칠 것이라는 얘기다.

◇日보복의 역설?…삼성·SK 수입선 다변화·국산화 탄력= 일본의 이번 조치가 ‘한국의 탈(脫)일본화’를 가속화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장정훈 삼성증권 애널리스트는 "90일 이상 일본 수입이 중단될 경우 반도체 생산에 큰 타격을 받을 수 있지만 더 장기적으로 보면 소싱처 다변화의 계기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양재 KTB증권 애널리스트도 "국내 제조사와 소재 업계도 일본 수입 심사 기간을 견딜 재고를 보유한 상황"이라며 "(일본의 이번 조치로) 우리나라 반도체 제조사가 자국산 소재 비중을 확대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 같은 전망은 일본에서도 나오고 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 신문은 "한국 기업들이 반도체 재료 등을 안정적으로 조달할 수 없다고 판단하면 탈일본 움직임을 야기할 수 있다"며 "삼성전자 등이 중장기적으로 거래처 확보를 진행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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