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보' 집착하는 나… 문제는 고정관념이다

머니투데이 강상규 소장 2019.06.23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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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재무학]<268>우리는 부정확한 고정관념을 갖고 산다…주식투자도 고정관념 때문에 망친다

편집자주 투자자들의 비이성적 행태를 알면 초과수익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픽=임종철 디자인기자/그래픽=임종철 디자인기자


“하루 1만 보 이상 걸으면 건강해진다.”

건강한 삶을 누리기 위해 하루 1만 보 이상 걷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로 주변에 걷기를 꾸준히 실천해 건강해졌다는 사람이 적지 않다. 예컨대 필자의 형은 출퇴근 때 차를 안 타고 걷기 시작하면서 몸무게를 5kg이나 뺐다며 “걸으니 내장 지방이 빠지더라. 예전에 입던 옷은 이제 커서 못 입는다”고 너스레를 떤다.



천만 배우 하정우도 그의 저서 『걷는 사람, 하정우』에서 걷기를 예찬한다. 하루 3만 보씩 걷고 가끔은 10만 보를 걷는다는 하정우는 엄청난 걷기 매니아다. 강남에서 홍대까지 1만6000보 정도를 걸어서 가고, 한 번은 비행기를 타기 위해 강남에서 김포공항까지 약 8시간 동안 걸어서 간 적도 있다고 한다. 하정우에게 ‘걷기’란 단순히 운동이 아니라, 숨쉬고 명상하고 자신을 돌보는 또 다른 삶의 방식이다.

그런데 일반인이 하정우를 따라 하기는 힘들다. 성인의 보행 속도는 보통 1분에 100보 정도인데 이 속도로 1만 보(약 8km)를 걸으면 대략 1시간 30분 이상 걸린다. 3만 보(24km)는 쉬지 않고 계속 걷는다고 해도 4시간 30분 이상이 소요된다. 거리도 거리지만 하루 4시간 반 이상을 오로지 걷기에만 투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하루 1만 보 걷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예컨대 매일 지하철로 출퇴근하는 필자도 평일은 하루에 6000보를 걷는다. 집에서 지하철역까지 20분 정도 걷고 다시 지하철역에서 회사 사무실까지 10분 정도 걷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말엔 2시간 이상을 투자해 1만 보 이상을 걷는다.

그런데 이렇게 걸을 때마다 드는 궁금증은 ‘왜 1만 보일까?’다. 사람들은 ‘1만 보’라는 걷기 기준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하루 얼마나 걷는지 측정하는 기구도 그냥 ‘만보계’라 부른다. 많이 걸으라는 취지에서 붙여진 이름이겠지만 왜 ‘5000보’가 아니고 ‘1만 보’인지 잘 모른다. 의학적으로 1만 보 걷기의 효과가 밝혀져서 그렇게 부르는 걸까?

사실 만보계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65년 일본의 한 회사가 계보기(pedometer)를 ‘만보계’(萬步計)라는 이름으로 출시해 판매하기 시작한 데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걷는 운동이 건강에 좋다는 인식을 고취하는 차원에서 전 세계적으로 ‘1만 보’(10,000 steps)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됐고 오늘날에 이르러 당연한 ‘명제’처럼 굳어져 버렸다.


그러나 애초에 ‘1만 보’라는 기준은 마케팅 차원에서 임의적으로 선택된 것으로 어떤 과학적인 근거를 토대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최근 미국 의사협회 학술지인 내과학회 저널(JAMA Internal Medicine)에는 우리가 하루 최소한 1만 보를 걸어야만 건강해질 수 있다고 여기는 건 잘못된 고정관념이라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밝힌 연구 결과가 발표돼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지난달 29일 미국 하버드대학교 부속 병원인 브리검여성병원(Brigham and Women’s hospital)의 연구팀은 평균 나이 72세인 노인 여성 1만7000여명을 대상으로 약 4년간 추적 조사를 실시했는데, 하루 평균 4400보를 걷는 그룹은 2700보를 걷는 그룹에 비해 사망률이 41%나 낮았다. 많이 걸을수록 사망률이 낮아지지만 7500보 이상부터는 더 이상 감소하지 않았다.

이 연구팀은 하루 7500보 정도만 걸어도 사망률을 낮추는 충분한 효과를 볼 수 있고 하루 1만 보 이상 걸어도 추가적인 효과는 거의 없다며 ‘1만 보’라는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말라고 권고했다. 이는 사무실에서 오래 앉아서 일하는 직장인처럼 하루 1만 보를 걷기가 힘든 사람들에게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심리학은 인간이 어떤 행동이나 판단을 할 때 ‘1만 보’와 같이 임의적인 정보나 기준에 얽매이는 심리적 편향을 보인다고 지적한다. 또 한번 입력된 정보는 쉽게 수정되지 않는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앵커링효과’(anchoring effect)라 부른다. 마치 배가 한 번 닻을 내리면 좀처럼 움직이지 않으려 하는 모습에 빗댄 표현이다.

인간이 심리적 편향을 보이는 임의적 기준은 다양하다. 예컨대 어떤 사람은 처음에 접한 정보에 쉽사리 편향되고, 또 어떤 사람은 가까운 사람에게서 받은 정보를 더 신뢰한다. 이때 받아들인 정보들이 과학적 근거가 있는지 여부는 따지지 않는다. 가짜뉴스가 SNS에 범람하고 많은 사람들이 가짜뉴스를 진짜로 믿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아무리 팩트체크를 해도 별 소용이 없는 건 앵커링효과 때문이다.

주식투자에서도 사람들은 임의적인 기준에 얽매여 투자를 망치곤 한다. 예컨대 A주식을 7만원에 투자한 사람은 7만원이 기준점으로 굳어져 이후 상황이 아무리 변동해도 A주식의 가치는 7만원으로 생각한다. 동일한 주식을 6만5000원에 투자한 다른 사람에겐 기준점이 6만5000원이 된다.

투자자들은 보통 자신이 매수한 가격을 기준점으로 삼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향후 기업의 펀더멘탈이 크게 변해도 자신의 투자 기준점을 수정하지 않고 과거의 기준점에 얽매이기 때문에 매도해야 할 때 팔지 못한다. 앵커링효과 때문이다.

행동재무학은 투자자들이 임의적인 기준점에 얽매일 경우 주식투자를 망치게 된다는 다수의 연구결과를 보여준다. 그런데도 투자자들은 앵커링효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임의적인 정보나 기준점에 매달려 투자를 망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1만 보 걷기도 매한가지다. 아무리 과학적인 연구 결과를 보여줘도 이미 사람들에겐 ‘1만 보’라는 고정관념이 뿌리 깊게 박혀 있다. 굳어져 버린 고정관념을 떨쳐버리긴 쉽지 않다. 단 1만 보 이상 걸어도(=고정관념을 버리지 않아도) 건강에 손해가 되진 않지만 주식투자는 앵커링효과 때문에 돈 잃고 스트레스가 쌓여 건강마저 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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