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빛낸 '역전의 용사들'

머니투데이 김고금평 기자 2019.06.19 0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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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조업→문화산업 반세기 만에 이뤄…BTS, 축구팀, 봉준호, 조성진 등 ‘유리천장’ 곳곳 뚫어

영국 런던 웸블리 공연을 펼치는 아이돌그룹 방탄소년단. /사진제공=빅히트 엔터테인먼트<br>
영국 런던 웸블리 공연을 펼치는 아이돌그룹 방탄소년단. /사진제공=빅히트 엔터테인먼트


올해 들어 대한민국은 새로운 문화 패러다임의 첫발을 내디뎠다. 세계를 바라보던 눈의 초점이 한국으로 쏠린 원년이라는 얘기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2019년은 그야말로 한국의 빛난 별들이 새 역사를 쓰며 지금까지 한 번도 맛보지 못한 달콤한 향연을 이어가고 있다.

BTS(방탄소년단)는 ‘21세기 비틀스’로 명명되며 세계 아이돌 팝 시장에서 독보적 인기와 위상을 자랑하고 ‘죽음의 조’에서 기대가 어려웠던 20세 이하 한국 남자 축구대표팀이 1983년 ‘4강 신화’ 이후 36년 만에 준우승을 차지하는 ‘이변’을 연출했다.



앞서 지난 5월 열린 칸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 사상 처음으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아 한국의 ‘위대한 문화’가 창조된 현장이 ‘증명’되기도 했다.

불과 몇 년 전 만하더라도 이 같은 일들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특히 음악에선 콜드플레이 같은 그룹과 맞먹는 ‘빌보드 입성’(싸이의 인기와 조금 다른 의미에서)과 월드 투어는 그저 환상에 불과한 이야기일 뿐이었다.



한국 축구 역사상 첫 준우승을 거머쥐고 금의환향한 쥔 U-20 한국 남자 축구대표팀. /사진=이동훈 기자<br>
한국 축구 역사상 첫 준우승을 거머쥐고 금의환향한 쥔 U-20 한국 남자 축구대표팀. /사진=이동훈 기자
축구는 더 처절한 현실이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기적처럼 이뤄낸 ‘4강 신화’라는 말이 암시하듯 그 이상은 꿈같은 이야기에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BTS도 20세 이하 남자 축구대표팀도, 그리고 할리우드의 아성을 무너뜨린 한국 감독 모두 ‘신화’라는 꼬리표를 떼고 ‘현실’이라는 역사성의 이름표를 달며 세계 문화 산업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어느 한순간 이들이 갑자기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 인물이 아니라, 그간 쌓아온 능력과 이전부터 세계의 문을 두드린 선배들의 노고가 합쳐진 결과물”이라며 “올해가 원년일 뿐, 앞으로 이런 그림은 더 많이 그려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 생필품 팔던 대한민국, 반세기만에 문화산업 강국으로

반세기 전 대한민국은 값싼 생필품을 팔던 제조업 국가였다. 옷과 신발을 만들어 팔거나 광부를 보내는 나라 정도로 선진국에 인식됐다. 시간이 흐르면서 반도체, 선박, 자동차 수출 등으로 산업국의 면모를 자랑했지만, 여전히 ‘제조업 위상’에 갇혀있었다.

문화 영역은 닿을 수 없는 미지의 세계였다. 2011년 SM엔터테인먼트 아이돌 그룹들이 파리를 시작으로 유럽에서 월드 투어를 시작했을 때 대한민국은 제조업의 위상을 넘어 문화 산업 강국의 가능성을 시험했다. 그 시험이 싸이의 실험으로 넘어갔을 땐 미국의 문이 비로소 열렸고, BTS에 이르러 방점을 찍었다.

박찬욱, 김기덕 감독이 콧대 높은 유럽 영화제에서 각종 상을 받으며 이름을 알리는 노력을 기울인 결과, 봉준호 감독의 영예도 자연스럽게 뒤따랐다. 봉 감독이 수상 소감으로 “내가 어느 날 갑자기 한국에서 혼자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 수많은 위대한 한국 감독들이 존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한 것도 한국 문화의 힘이 적층(積層)됐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지난 2015년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조성진이 한국인 최초로 우승을 거머쥔 것 역시 수많은 한국의 클래식 연주자들의 경험과 땀이 작용한 결과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칸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은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 /사진=김창현 기자<br>
칸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은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 /사진=김창현 기자
◇ ‘유리천장’ 벗어난 밀레니엄 세대의 도발…“시스템의 지배 아닌 지원 절실”

한국의 아이돌 그룹을 통해 보인 새로운 그림은 기존 제작 방식과 거리가 멀다. 이를 제대로 증명하는 사례가 BTS다. 회사가 시키는 대로 따라가는 ‘팔로워’가 아닌, ‘리딩’하는 멤버들은 스스로 크리에이터(창작자)가 되고, 분업과 협업을 통한 융복합의 세계를 만들어내며 서로를 존중하는 배려의 태도를 습득한다. 지금 아이돌 그룹은 대개 이런 절차를 밟고 음악 산업의 새 판을 짜는 연습에 한창이다.

U-20 한국축구대표팀에서 막내 이강인이 ‘막내 형’이라는 언어역설의 표현으로 상징되는 역할론이나 버스 내에서 ‘떼창’을 부르는 자유로운 팀 분위기는 스포츠계에선 ‘혁신’에 가깝다. 경쟁 앞에서 개인의 자유는 묵살당하기 일쑤였던 과거 분위기는 이 팀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팀원들이 스스로 선택하고 제어하고 도모하는 일련의 과정은 과거 시스템을 한꺼번에 뒤집는 역발상이자 새로운 창조의 신호탄인 셈이다.

정덕현 대중문화 평론가는 “제작자와 감독이 주도권을 쥔 과거 연예계와 스포츠계가 기존 시스템으로는 새 시대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판단에서 나온 대안적 변화는 불가피한 선택”이라며 “기량과 능력을 가진 선수(아티스트)의 가능성을 시스템이 뒷받침해 줘야 한다는 사실을 모두가 공감한 결과”라고 해석했다.

2015년 쇼팽 콩쿠르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한 피아니스트 조성진. /사진=이기범 기자<br>
2015년 쇼팽 콩쿠르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한 피아니스트 조성진. /사진=이기범 기자
조성진도 연주를 ‘노동’이 아닌 ‘즐거움’의 가치로 여긴다. 스스로 “귀한 연주를 하는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는 꿈 앞에서 하루 10시간 같은 강도 높은 연습 대신 하루 4, 5시간씩 집중 연습을 통해 자신을 돌본다. 여가에 축구나 야구를 즐기는 것도 그 일환이다.

전찬일 영화평론가는 “1990년대까지 일본 식민 사관에 맞춰 ‘우리는 안 돼’라는 인식이 알게 모르게 퍼지다 2000년대 들어 과거 교육을 받았지만 나름 저항한 세대들이 지금의 문화를 이끌고 있는 것”이라며 “잠재된 그간의 능력과 가능성이 때를 만나 뒤늦게 발현되고 있을 뿐이다. 한국만큼 융·복합 재능에 뛰어난 민족도 없다”고 강조했다.

황진미 대중문화 평론가는 “밀레니엄 세대에게 ‘유리천장’은 이미 깨진 지 오래고 ‘3세계’에 머물지 않고 ‘1세계’ 진입은 물론, 일원이 됐다는 자부심도 크다”며 “수준도 높아지고 그런 감각(기존 시스템의 부작용에 대한 인식)을 공유한 세대들은 다양한 창발성이 만들어지는 환경에 빠른 속도로 적응해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 문화산업 국가의 도약…깨어있는 대중과 수준 높은 아티스트의 ‘합작’

한국을 빛낸 '역전의 용사들'
문화산업 강국 이미지로 얻게 되는 효과도 만만치 않다. 벌써 축구대표단의 막내 이강인의 몸값은 100억원대로 추산되며, 손흥민·류현진 등 세계 곳곳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의 뒤를 이어 한국이라는 브랜드를 격상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최근 부산에서 열린 BTS 공연에 팬들이 쓴 비용만 60억원에 달한 것으로 추산된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BTS가 2014년부터 2023년까지 10년간 유발하는 경제 효과는 총 56조1600억원이다. 해당 기간에 외국인 관광객은 연평균 79만 6000명 늘어날 것으로 예상돼 부대 효과도 기대 이상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콘텐츠산업 매출액은 2017년 대비 5.2% 증가한 116조 3000억 원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국내 콘텐츠산업 수출액의 추산액은 전년 대비 8.8% 증가한 75억 달러(8조 9062억원)다.

문화 각 장르에서 한국의 선전이 이어지면서 문화가 차세대 먹거리 산업의 중심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힘을 얻고 있다. 무엇보다 반짝 효과에 그치지 않고 장기적인 생명력을 보장받는다는 데 의의가 있다.

정덕현 평론가는 “80년대 정치적 민주화를 거치고 90년대 인터넷을 통해 키워진 수준 높은 대중의 깨어있는 의식과 목소리에서 문화산업의 가능성을 볼 수 있다”며 “완성형으로 가는 BTS 여정(또는 축구팀, 한국영화, 클래식 등)에 대중이 끊임없이 참여하는 공간이 있고 이 공간이 글로벌로 커지는 변화들은 대중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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